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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나주) 보물 제2037호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보물 제2037호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망화루(望華樓)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문으로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이다.

 

 

 

 

- 금성토평비와 사마교비 -

 

 

 

 

 

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中三門)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에 있던 출입문

 

- 중삼문 -

 

 

 

나주목 객사 금성관 내삼문터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가장 안쪽에 있던 출입문인 내삼문이 있던 터로 세 칸 규모이다.

 

 

- 금성관과 동익헌, 서익헌 -

 

 정면으로 보이는 우람한 건물은 금성관이고, 

양쪽으로 붙어 있는 건물은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

 

 

 

망궐례 望闕禮

지방에 근무하는 관리는 중앙에 있는 관리처럼 직접 왕을 배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과 궁궐의 상징인 궐자를 나무에 새긴 패를 만들어 모시고 예를 올렸다. 대체로 근무지에서 왕과 왕비의 생일, 설,

단오, 한식, 추석, 동지 등 명절날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정문 망해루 앞 오늘날의 풍경

 

 

 

정수루(正綏樓)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6호

나주의 관아문으로,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동계 우복용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곳을 지나면 나주목 관아인 동헌으로 들어가며

외동헌과 내동헌이 위치하며 현재는 내동헌인 목사내아만 남아 있다.

 

정수루 주변으로는 목사를 보좌하던 향리들의 집무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나주목의 궁실인 나주객사 금성관과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등의 건물이 있다.

 

 

 

옛 나주 관아의 터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를 지나면 옛 관아의 터가 있으며 우측 해바라기 뒤로 나주목사 내아인 금학헌이 있다

 

 

- 금학헌과 옛 관아의 터 -

 

 

- 금학헌 -

 

 

 

- 금학헌 안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