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나주) 사적 제483호 : 나주 향교(羅州鄕校)

 

언제 : 2022년 9월 29일 목요일

어디 :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 향교

 

 

나주목관아(사적 제483호)는

조선시대 나주읍성 내 나주목 객사와 내아, 관청, 향청, 향교 등을 아우르는 국가사적이다.

호남의 행정·경제·교육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나주목의 위상을 엿볼 수 있어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이번엔 나주향교를 방문했다.

향교란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요즘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학교로, 공자를 중심으로 유학의 성현 27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며 지방민을 교육하고 교화하기 위해 만들었다.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 8월

전국 12목(전국을 12개로 나누어 목(牧)이라 함)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어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주 향교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제사 지내는 공간이 앞에 있고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특히 제사공간인 대성전은 규모가 대단히 웅장하고 그 건축양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하는 곳이다.

 

나주향교 일원은

국가 사적 제483호이고  이중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나주향교 외삼문

외삼문을 통해 들어가려니 문이 닫혀 있어 담을 따라 문이 열린 곳을 찾는다.

 

 

 

 

 

내삼문

 

 

대성전(大成殿)

 

 

 

대성전(大成殿)

보물 제394호

나주향교는 1407년(태종 7) 성현들의 위패를 봉안·제향하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관학으로,

현 건물은 17세기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향교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으로 이루어진다.

 

나주향교는

외삼문에서 내삼문으로 이르는 공간을 지나면 전면에 대성전과 좌우의 동무·서무로 이루어진 향사공간(享祀空間)이 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대성전은 가장 큰 규모의 대성전에 속한다.

전면에는 퇴를 만들어 향교의 전형적 형태를 따랐으며 의례시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3단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주초를 놓아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후기 양식에 속하며

주심포계가 익공계로 바뀌어가는 과도기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지붕은 대성전에서는 드물게 팔작지붕이다.

 

대성전 뒤로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과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서재가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서울 문묘와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골목을 따라가니 저 앞에 비석군이 보이고 향교 정문이 보인다.

향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 : 유학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 기능

둘째 : 학생들이 유학을 공부하는 강학 기능이다.

 

참고로

향교는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을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향교의 터가 평지이면

앞 쪽에 제향공간이 오고, 뒤쪽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경사진 터일 경우 

높은 뒤쪽에 제향공간을 두고 앞쪽 낮은 곳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헤향공간을 강학공간보다 높은 터에 두어 높은 위상을 갖게 하는 것이 특색이다.

 

따라서

나주향교는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고 있다.

 

 

- 나주향교 비석군 -

 

 

 

 

 

 

지금까지 다녀본 향교는

대체로 경사진 곳에 향교가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주향교의 배열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전묘후학과 전학후묘라는 배치의 이유를 알고 나니

역시 여행의 의미 중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동재

11칸으로 툇마루와 회랑 그리고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재 - 명륜당 - 동재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명륜당은 스승과 학생이 모여서 교육을 하는 곳이며

일반적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엔 온돌방을 두었다.

 

동재와 서재는 교생들의 기숙사로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과 양인의 신분에 관계없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건물 사용하는 사람들이 신분상 구별을 두었는데, 문과공부를 하던 양반 자제는 동재를,

무과나 잡과 공부를 주로 하던 양인 자제는 서재를 이용했단다.

 

서재

명륜당 서쪽에 있는 3칸 건물로 마루와 방 그리고 넓은 회랑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면에는 아궁이와 창문 후면에 마루와 출입문이 있다.

 

 

 

 

 

배수로가 매우 인상적이다.

처마 밑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배수로가 설치되었는데, 명륜당 앞에서는 굴곡을 만들어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배수로다.

맞은편이 동재이다.

 

 

명륜당 앞에서 본 동재와 서재 그리고 대성전

그리고

다녀본 다른 향교에 비해 마당이 많이 넓고, 전묘후학의 배치에 따라 대성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