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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나주)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나주역사

 

나주 여행을 마치며 목포로 가려던 중

문득

내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나주역사임이 생각나 나주구역사를 찾아보았다.

나주구역사는 잘 보존되어 있으며, 역사 앞에 기념탑이 쓸쓸히 서 있어

나이 어린 어떤 날의 기억을 추억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나주역사(光州學生獨立運動 震源地 羅州驛舍)

전라남도 나주시 죽림동 60-1번지에 있는 호남선 구 나주역사로, 

1913년 7월 1일부터 2001년 7월 10일까지  영업하였다.

 

 구 나주역은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과 함께 신축한 근대건축물이다.

신축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설계도나 시공 관련자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1923년 북쪽벽에

화물창고 4평을 증축하였고,1970년 일본 기와를 골스레트로 바꾸고 건물 외부에 있던 개찰구를 건물 내부로 바꾸었다.

현재 역사의 기본구조나 골조 목재 등은 초창 당시 그대로이다.

 

나주역사는 1929년 10월 30일

광주로 통학한 한국인,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이 계기가 되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되어

154개교 54,0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며

 현재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중순에 전면 개보수를 거쳐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6년 4월 순종의 사망으로 6.10만세 운동이 전개된다.

6·10 만세 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 교육, 수업 중 조선어 사용, 학생회의 자치,

언론과 집회의 자유 등을 내걸고 동맹 휴학을 전개하였다.

이들 동맹 휴학의 상당수는 학생들의 비밀 결사가 주도한 것이었다.

당시 전국 각지의 중등학교에는 독서회 등이 다수 조직되어 있었으며, 광주 지역은 성진회라는 비밀 결사 조직이 있었다. 또 1929년에는 광주의 각 학교 독서회를 지도하는 독서회 중앙 본부가 조직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간의 충돌은 광주 시내 한·일 학생 간의 충돌로 번져 나갔다. 

광주 지역 학생들은 각 학교 독서회 조직을 중심으로 이를 항일 시위로 확대시켜,

11월 3일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광주에서의 학생 시위 소식을 들은 서울의 조선 청년 총동맹은

전국의 청년 운동 단체, 학생 단체와 연락하여 전국 각지 학생들의 시위를 이끌어 냈다.

학생 시위는 12월초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어 개성, 인천, 원산 등 주요 지방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1930년 1월 중순부터 도시 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퍼져나갔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였다.

투쟁의 형태도 시험 거부, 백지 동맹, 동맹 휴학, 격문 살포, 교내 시위, 거리 시위 등으로 다양해졌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이 운동은

 3·1 운동 이후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으며,

전국적으로 194개 교에서 5만 4,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 광주학생 항일운동 당시 격문을다룬 기사(동아일보)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당시의 격문|

전투 청년 학생 제군! ……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정의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자!
·검속된 학생을 탈환하라.
·교내 학생 자치권을 옹호하라.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라.
·전국 동맹 파교로 모든 요구를 관철하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식민지 어느 지역에서도 한일간의 감정은 존재했다.

도심의 중심지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정치와 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일삼는

식민지의 삶은 고스란히 학생들의 생활 속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넓은 평야가 있는 나주의 경우에도 경제적 부를 독점하는 것은 일본인 대지주들이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부유를 누리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은 차별과 멸시 속에서 항일 의식을 키우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보툥햑교 학생인 이광춘,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난투극은 일본인 학생 50명과 한국인 학생 30명이 싸웠는데 한국인 학생 30명이 사기면에서는 더 유리하였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항의하였다.

이에 일본인 기업인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탈하는 것에 대해

쌓여오던 분노가 겹쳐서 폭발하게 된다.

이를 접한 1929년 11월 3일 허정숙은 광주로 내려와 이들 학생들을 면담하고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 여성 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시위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

- 위키백과에서 모셔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