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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나주) 사적 제337호 : 나주 읍성(羅州邑城)과 일원

- 나주읍성 남고문(南顧門) -

 

언제 : 2022년 9월 29일 목요일

어디 :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읍성

 

사적 제337호 나주읍성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서울 도성(都城)과 같이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동·서·남·북의 사대문으로

동문은 동점문(東漸門), 서문은 영금문(暎錦門), 남문은 남고문(南顧門), 북문은 북망문(北望門)이며,

객사인 금성관, 동헌(제금헌), 목사내아 관아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전라도의 대표 석성(石城)이다.

전체 둘레 3.7㎞, 면적 97만2천6백㎡ 규모로,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모습은 조선 시대 나주로 부임한 목사 김계희(1457~1459)에 의해 완성됐다.
하지만 1910년대 일제 강점기 때 성문은 철거되고, 성벽이 크게 훼손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에 나주시는 역사문화도시 나주의 위상 정립과, 역사적 정체성 회복을 위해

지난 1993년 남고문(南顧門) 복원을 시작으로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을 추진해왔다.

이에 2005년 10월 동점문(東漸門)과 2011년 10월에 영금문(映錦門, 또는 서성문)복원을 완료했으며,

2018년 북망문(北望門)을 끝으로 25년 만에 4대문 복원 사업을 완료했다.

 

- 동점문(東漸門 -

 

 

- 영금문(映錦門 - 서성문) -

 

 

 

- 남고문(南顧門) -

 

 

- 북망문(北望門) -

 

 

- 나주 읍성 4대문 -

 

 

 

신숙주申叔舟

1417년(태종 17년) 희현당 신숙주는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에서 태어났다.

 

신숙주는 누구인가?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집현전 학사

능통한외국어로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변혁기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세조의 신임을 받았지만 늘 외로워 - 명예는 잃었지만 한글업적은 남긴 대학자로

역사의 흐름에 떠밀린 인생

 

신숙주(申叔舟, 1417~75)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다.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는 반비례로 변절자 · 겁쟁이 또는 시세를 추종한 자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 임금 단종을 저버리고 씩씩한 기상으로 뻗어 가는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동료인 성삼문(成三問) 등이 절의를 지키고 죽은 것과는 달리, 그가 새 임금에게 빌붙어서 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한글을 창제하는데 음운학자로로 혁혁한 공로가 있는 분이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빚어진 역사적 해석 때문에 신숙주는 변절자로 낙인찍혀졌다

세종과 신숙주

어느 날 밤, 세종은 내시를 시켜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이때 입직하고 있던 신숙주는 밤이 깊었는데도

촛불을 켜 놓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시는 서너 차례 가서 엿보았는데, 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든 모습을 보았다.

내시가 이 일을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입고 있던 돈피 갖옷(모피로 안을 댄 옷)을 벗어 신숙주에게 덮어 주라고 했다.

곤히 잠들었던 신숙주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학자들도 이 소문을 듣고 더욱 열심히 학문에 열중했다. 세종 또한 밤늦도록 학문에 열중했는데,

그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쟁하듯 촛불을 켜 놓고 밤을 샜던 것이다.

 

세조와 신숙주

세종이 죽은 뒤에 신숙주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몰려왔다.

새 왕 문종(文宗)은 어질기만 할 뿐 늘 병에 시달렸고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속에 신숙주는

또다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중국에 갈 때에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뽑힌 것이다.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몇 달 동안 먼 이국 땅을 함께 넘나들며 그야말로 의기를 투합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는데 한 사람은 기개가 넘치는 왕자였고, 한 사람은 차분한 학자였다.

신숙주는 이때 분명히 보았다.

수양대군의 커다란 포부와 꺼질 줄 모르는 정열, 그리고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왕의 재목을 확인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뜻이 척척 맞았다. 이 만남은 한편으로는 두 청년의 꿈이 실현되는 계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찬탈 · 변절의 역사와 비난을 받게 되는 갈림길이 되었다.

 

성삼문과 신숙주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깜짝 놀랐다.

내가 인식하고 있던 신숙주가 뜬금없이 나주 어느 골목에 흔적을 남기고 있어 놀랐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와 궁금했던 신숙주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았으나, 

어떤 분은 긍정적 평가를 하고

또 다른 분은 부정적 평가를 하기에 관심 있으면 본인이 직접 확인해 보면 도움이 될것이다.

 

 

- 이로당 소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