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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나주) 영산포 홍어거리와 등대

 

언제 : 2022년 9월 29일 목요일 

어디 : 전라남도 나주시 홍어거리

 

어제 자정이 다 되어 귀가했다.

오늘부터 2박 3일 여정으로 다시 남도 나주 등지를 돌아보기 위해 짐을 꾸렸다.

 

9월 29일

09:10

집을 나서

09:40

주안 전철에서 용산행 특급 전철을 이용

10:41

용산역에서 KTX 출발

 

 

 

기차 안에서 여행지를 점검 후 짧은 수면을 취한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학창 시절 10시간 이상 걸려 지루했던 곳을 이젠 2시간 만에 도착한다.

 빨라서 좋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구불구불 세상 구경하지 못하고 터널을 지주 지나니

옛 인심과 인정을 잃어 또한 아쉽기도 하다. 

 

 

 

12:37

생전 처음 나주에 발을 딛는다.

 

아주 오래전

목포 유달산 여행길에 기차로 나주를 지나긴 했지만, 나주에 발을 딛는 일은 처음이다.

통상

내 여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이번 여행은 나주, 목포, 강진, 장흥이라 목포에 사는 막냇동생이 나주까지 승용차 마중 와

함께 2박 3일 편한 여행을 할 것이다.

 

새로 지은 나주역에서 막냇동생을 만나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이곳 음식인 나주곰탕도 있지만 쉽게 맛볼 수 없는 홍어탕을 먹자니

막내 동생은 영산포 홍어거리에 차를 댄다. 

 

 

- 영산강 황포돛배 선착장 -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포는  

울산항과 평택 남양항과 함께 신라 3대 포구 중 하나로 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국제항구로 명성을 떨쳤다는데,

바로 영산강 깊숙이 국내 유일한 내륙에 등대가 있는

영산포가 지금까지 그 명성을 잇고 있다.

 

 

- 영산포 홍어거리 -

 

 

 

처음 길이라 맛집을 몰라 가장 깔끔하게 보이는 식당으로 가니

1층은 사진처럼 홍어를 선물용 포장하여 판매하고 식사는 2층에서 한다는데 계단을 오르니

아래 사진처럼 웬 북과 북채가 놓여 있다.

흥미롭다.

 

 

 

 

 

 

홍어애탕으로 점심을 들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추어탕이나 혹은 순천에서 먹었던 짱뚱어탕과 같이 시래기를 넣어 비슷하나

맛은 쌉싸름하는 듯 달랐다.

 

바로 근처가 우리나라 유일하게 내륙에 등대가 있는 영산포 등대와

영산강 황포돛배 선착장이 있어 배를 타고 영산강을 보기 위해 선착장으로 내려간다.

 

 

 

영산강으로 가던 중

황포돛배와 홍어가 흥미롭게 그려진 시설물이 있어 담았더니 공중화장실이다

 

 

 

영산강 너른 품에 안긴 영산포와 홍어 이야기

영산포에 살어리랏다.

영산포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 자고 있다. 고려 말 서해안 일대 섬사람들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강을 따라 이곳까지 피난 와 머무르곤 하였고

그러는 사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톡 쏘는 바로 그 맛! 삭힌 홍어!  맛 좀 보시오

영산포는 고려말부터 600년 이상 흑산도 홍어가 거래되어 온 홍어의 본 고장이다.

흑산도 홍어가 영산포까지 배에 실려 오는 과정에 숙성되었던 것에서 유래된 삭힌 홍어는 

톡 쏘는 독특한 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함께 먹는 '홍어삼합' 이 유명하다.

홍어는 예부터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던 음식이고 결혼식, 회갑, 초상 등 집안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다.

홍어가 빠지면 잔칫상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홍어는 전라남도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갖고 있다.

 

 

 

영산강 제8경 중 제5경

금성상운(錦城祥韻)

상스러운 구름이 지평선 위에 누워있는 나주평야

 

제 1경 영산낙조(榮山落照) : 영산강 저녁노을이 환상적인 하굿둑

제 2경 몽탄노적(夢灘蘆笛) : 곡강(曲江)이 감싸고 흐르는 여울이 꿈 길 같은 식영정(息營亭)

제 3경 석관귀범(石串歸帆) : 돌아오는 황포돛대와 영산강 절경이 어우러지는 석관정(石串亭)

제 4경 죽산춘효(竹山春曉) : 봄철 새벽 이슬 머금은 들꽃이 손 흔드는 죽산보(竹山洑)

제 5경 금성상운(錦城祥雲) : 상스러운 구름이 지평선 위에 누워있는 나주평야(羅州平野)

제 6경 평사낙안(平沙落雁) : 극락강과 황룡강 물길이 손잡고 흐르는 승촌보(昇村洑) 일대의 넉넉한 경관 

제 7경 풍영야우(風詠夜雨) :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 편액이 걸린 풍영정(風詠亭)

제 8경 죽림연우(竹林煙雨) : 담양의 대나무 숲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 나해철 시인의 영산포 -

 

 

- 나주 문화권 -

 

 

- 영산포 문화권 -

 

 

 

영산강의 연인(戀人) : 아랑사와 아비사 앙암바위

 

나주시 다시면 회진에서 영산강을 따라 영산포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가야산에 있는 56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앙암(仰岩)바위" 또는 "아망바우"라 부른다.

 

앙암바위 일대는 그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바위 아래 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깊은 소(沼)를 만들어 영산강을 다니던 배들이 자주 침몰해 사람들은 앙암바위 아래에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 앙암바위에는 삼국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택촌에 사는 아랑사라는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는데 앙암바위 옆 진부촌에 사는 아비사라는 처녀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홀아비가 병들어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에 나왔으나

물고기를 잡을 수 없어 울고 있었다는 것.

 

뛰어난 어부 아랑사는 당장 물고기를 잡아 아비사에게 주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밤마다 앙암바위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이곤 했는데

이를 시기한 진부촌 젊은이들이 아랑사를 앙암바위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도 아비사는 앙암바위를 찾아가곤 했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마을 젊은이들이 가보니 강에서 바위를 타고 올라온 커다란 구렁이와 아비사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닌가!

마을 젊은이들은 이를 나쁜 징조라 여겨 그들을 바위 아래로 굴려 버렸다.

그 뒤로부터 진부촌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고, 두 마리의 얽힌 구렁이가 밤마다 진부촌에 나타났다.

이에 마을 노인들이 무당들로 하여금 음력 8월에 씻김굿을 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한 뒤부터는 화를 면했다 한다.

 

지금도 앙암바위 절벽에는 아랑사와 아비사가 서로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남아 있어

황포돛배를 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그 모습이 눈에 잘 보이는 사람은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황포돛배 선착장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영산강 황포돛배를 승선하여 영산강을 유람했다.

혼자였다면

점심 들고 당연히 나주 옛 향교나 객사 등지를 찾아갔을 터인데, 막냇동생이 미리 확인했던 듯싶다.

덕분에

영산강을 유람하는 즐거움도 갖고.

 

 

 

 

 

 

앙암바위

앙암바위 전설처럼 나에게도 보일까?

궁금해 황포 돛대가 앙암바위를 지날 때 자세히 살펴보니 눈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황포 돛대가 되돌아올 때 다시 보니 아래 사진처럼 두 사람 얼굴이 보이고

서로를 안고 있는 듯싶은 모습을 담아보았다.

 

 

- 아랑사와 아비사 -

 

 

 

 

 

 

 저 멀리 무등산이 조망된다.

 

 

- 황포돛대 선착장 -

 

 

영산포 등대 = 등록문화재 제129호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 영산포 등대

 일제강점기 영산강의 가항 종점인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등대이다.

1915년 설치된 시설로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1989년까지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영산포 선창은 1960년대까지 각종 선박이 왕래하면서 많은 수산물들이 유통되었다.

 

 

 

 

영산강에서 영산포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나주는 신라 후기 때 금성(錦城)으로 불렸기에 당시에는 영산강을 금천(錦川) 또는 금강(錦江)이라 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 했다. 

고려시대에 목포 앞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나주 남쪽의 강변에 마을을 개척한 후, 

그곳을 영산포(榮山浦)로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1981년 12월 영산강 하구가 완공되어 바닷물이 들지 못하지만

그전에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 구간은 항해가 가능하여

강 유역의 기름지고 넓은 들판에서 나는 농산물과 바다에서 오는 물자들로

영산포는 일제강점기까지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