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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덕수궁

덕수궁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6만 1500㎡.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讓位)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定宗)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태종(太宗)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이라 하였다.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그의 재위(在位) 2,3년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기 전의 건축보다 더 훌륭한 법궁(法宮)을 이룩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 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615년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배알하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후 영조(英祖)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60년이 3번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1일 세손(후의 正祖)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高宗)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또한 공역(工役)을 일으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1896년(건양 1)에는 공역의 준공이 있었고, 그해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 태후(太后)·태자비(太子妃)는 경운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열성어진(列聖御眞)과 민비의 빈전(嬪殿)도 경복궁에서 옮겼다.

 

 

 

 


위 안내도에 표시된 번호순으로 여행을 한다.

 

 

①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이다.
동향을 한 단층문으로 다른 궁궐의 정문이 2층인데 반해 단촐한 듯한 느낌이다.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다가 1906년  다시 지으면서 대한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60년에는 서울 시청앞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덕수궁 궁성이 뒤로 물러나면서 함께 14m쯤 후퇴하여 현재의 위치가 되었다.

매년 차이가 있으나 동절기를 제외한 기간동안에는 매주 토요일 수문장 교대식 재현이 행해져 좋은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보수공사로 인하여 현재 서울광장에서 재현되고 있음)

현재 보수공사로 인하여 직접 사진 촬영을 할수는 없었다

 

 

② 금천교(禁川橋)

 


궁궐을 드나드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뜻으로 아래로 명당수가 흐르게 하고 그 위로 놓은 돌다리로 2개의 나란한 무지개 다릿발이 드리워져 있음.

이 또한 공사 중이어서 직접 촬영하지 못했다.

 

 

③ 중화문(中和門)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세웠으나, 1904년 화제때 함께 불탄 것을 1906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중화전을 단층으로 지을때 함께 단층으로 줄여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

 

 

④ 중화전(中和殿)

 


원래 중층건물이었으나 광무 8년(1904년)에 화재로 소실 후 1906년 단층건물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중화전은 고종황제가 1897년 러시아 공관에서 덕수궁으로 옮긴 후 재위하는 동안 조회를하는 정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중화전의 앞뜰에는 조정회의나 기타 의식이 있을때 문무백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크고 넓은 돌 기단을 2중으로 쌓고 그 읭[ 세운 건물은 정면5칸, 측면4칸 규모이다. 내부에는 황제가 앉던 어좌가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있다.

 




⑤ 석어전(昔御殿)

 


1593년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선왕들을 회상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인목대비의 유폐처가 되기도 했다. 궁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2층 건물로 1층 마루 안쪽을 들여다 보면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목조 건물 특유의 소박함과 다정함이 일품인 현재의 석어당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한 것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것이 특징이다.


 

⑥ 덕홍전(德弘殿)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이다.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의 하나이다. 정면이 3칸, 측면이 4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구조를 하고있다.

 

 

⑥ 함녕전(咸寧殿)

 


보물 제830호.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녕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⑧ 정관헌(靜觀軒)

 


함녕전 뒷뜰 동산 속에 1900년에 지은 서양식 휴식터, 고종이 다과를 들며 쉬거나 외교관 연회처로 사용하였다. 벽을 트고 서양식 주방을 놓았으며 지붕은 구리판임이 특징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직사각형의 평면으로 내부 공간은 외진과 내진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진고주는 굵은 원주로 되어 있고, 외진주는 목재기둥을 사용한 주두는 로마네스크 형식이다

 

 

⑨ 즉조당(卽조堂) ⑩ 준명당(浚明堂)

 


좌측의 준명당과 우측의 즉조당은 2칸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처이자 임금의 집무처로 1904년 불탄 후 그해 다시 지음. 즉조당 현반은 고종의 어필이다.
*신하와 사신 접견처, 1904년 불탄 후 그해 다시 지음.  뒤에는 고종/순종 어진 봉안처였고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쓰였다.
 
 
⑪ 석조전(石造殿)
 

정부 재정고문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만든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딩이 설계를 맡고 건축기사 심의석이 감독하였다. 18세기 유럽 신고전주의 궁전건축양식을 모방하여 고종의 집무실 겸 접견실의 용도로 10년에 걸쳐 지은 것으로 광복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거쳐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중이다.
1901년 기초공사가 마무리 된 이후 1906년 완공되었는데 공사비가 129만원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궁중유물 전시관으로 개관되어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사실상 60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공사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쓰라린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궁중유물전시관>>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명(明)에 대해서는 사대외교를, 그 밖의 이민족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여러차례의 외침을 극복하며 세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5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이어져 온 우리민족 마지막 왕조이다.

역사의 무대위에 올랐던 수많은 국가들의 거의 대부분이 채 3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500년 역사는 단지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오랜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문화의 힘이었다.

조선은 왕실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그 흔적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궁궐,능, 종묘에서는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 한 단아한 조선 왕실의 궁중 문화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또한 최근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된 종묘와 창덕궁에는 당시왕실에서 사용하던 궁중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조선 왕조의 제도와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92년 12월, 덕수궁 석조전에 개관된 궁중유물전시관은 이러한 왕실 문화 유산을 한데 모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전시하는 사회 교육장으로서 청소년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에게 문화민족의 긍지를 심어줌은 물론 지난시대 우리 왕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시관은 아기자기하고 규모가 크지않아 관람하는데 부담이 없다. 두개 층으로 나뉘어진 전시관에는 궁중의복 및 생활 물품, 그림등을 비롯해 역대 왕들의 어보, 어필, 어진도 직접 볼 수 있으며
각 시대별 발명품 및 궁중 의식에 관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⑫ 덕수궁미술관

 


 

 

⑬ 광명문(光明門)

 


중화문 옆에 자리잡은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 남행각의 정문이었다. 그러나 1938년 석조전을 개관하면서 흥천사의 범종과 보루각의 자격루(물시계. 국보 제229호)를 진열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문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소인 중화문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자격루(自擊漏) : 국보 제 229호

자격루는 조선 중종때 만든 물시계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동시보장치를 물시계에 연결 표준시계로 썼다. 세종 때 발명된 자격루는 단종 때 자동시보장치의 고장으로 사용이 중지되고 말았다.

 

자격루가 다시 움직이게 된것은 예종때였고, 연산군 시절에는 자격루가창덕궁으로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잘맞지 않아서 중종 때에 새로운자격루를 만들었다.

 

이 유물은 광복전 경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때만 해도 파수호와 수수통을 잇는대롱이 있었고, 대석(臺石)도 있었는데, 지금은 용이 새겨진 누기(淚器)만이 남아있다.

 

♠ 흥천사 종(興天寺 鍾)

세조 8년(1462)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종으로,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 근처 흥천사에 있었던 종이다.

 

중종 5년(1510) 흥천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영조 23년(1747)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가, 창경궁을 거쳐 이 곳에 걸려 있다.

 

이 종은 명문에 의하면 효녕대군과 임영대군, 영응대군 등이 만들었으며, 문장은 한계희, 글씨는 정난종이 썼다.

 

규모가 큰 이 범종은 전형적인 조서 전기의 양식이다.

 

 

 

 

 

 

♠ 신기전 기화차(神機箭機火車)

신기전은 고려말엽 최무선이 만드 주화(달리는 불)를 1448년(세종30년)에 개량한 것으로 대나무 화살의 앞부분에 쇠촉을 달고, 그 뒤쪽에 원통형의 종이약통을 부착하여 불을 붙이면 발사되는 병기이다.

신기전의 종류로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산화신기전등이 있는데,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은 주로 신기전 기화차에서 발사되었다. 신기전기는 지름 4.6센티미터의 둥근 구멍에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을 꽂아 사용하였다.

발사할때에는 신기전기가 실려있는 화차의 발사각도를 조절한 뒤, 신기전 약통에 붙여진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발사되었다. 신기전의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50미터, 소신기전이 100미터 가량이며, 또한 제작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밖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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