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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화성) 세계문화유산 - 융 건릉

 

 

 

 

 

 

 

 

용건릉 제실

 

 

 

 

웅건릉 개비자나무 - 천연기념물 제504호 - 융건릉 제실 마당에 있다

 

 

 

 

건릉 가는 길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는 온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이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하건데, 의외로 정조에게서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文置)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지 않아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

번번이 조금만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 정조실록 - 권8. 3년(1779) 8월 3일 -

 

 

 

정조는 문치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였는데,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 16년 10월 26일에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50발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 중 마지막 화살은 아예 쏘지 않고 두면서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라고 말햇다 하니 그이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강단 있는 모습은 8일 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 정조실록- 권42. 19년(1795)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나섰다. 115명 기마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6,000여 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 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으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 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건릉에서 융릉으로 가는 길에 숲에서 두꺼비를 보았다.

 

 

 

 

 

 

 

 

 

 

 

 

 

 

 

 

 

 

"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을 빌었다.

그러나 영조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페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그러나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 단 하나뿐인 아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대리청정이 순탄할 리 없었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사도세자는 끝내 영조의 미움을사게 되었다.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죄목은 다음과 같다.

정신질환으로 궁녀를 죽인 것, 여승을 궁녀로 만든 것, 그리고 아무도 몰래 20여 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유람했던

수상한 행동을 한것,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 그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비극 또한 잠들어 있다.

왕과 세자이기 전에 부자 사이였던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욱 가슴시린 것은 바로그런 이유다.

 

임금이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묻기를 "글을 익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 영조실록, 권60. 20년(1744) 11월 4일

 

 

 

 

 

 

 

 

 

 

 

 

장마 기간이라 융건릉 숲에는 버섯이 많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