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1)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공직자 자세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공직자 자세

목민관이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은 ‘公廉(공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여유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모든 공직을 버리고 낙향한 뒤 생활했던 곳이다.


 

1801년부터 시작된 다산 정약용(1762∼1836년) 귀양살이는 1818년에야 끝난다.

귀양살이가 풀리기 몇 달 전인 그해 봄

다산은 필생의 저서 ‘목민심서’를 48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탈고했다.

올해는 목민심서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백성을 돌봐주고 부양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다산은 ‘목민(牧民)’이란 이름을 붙였다.

또 당시 자신은 전혀 이를 실천할 방법이 없었기에 ‘마음으로 전하는 책’이라는 뜻에서 ‘심서(心書)’라고 했다.

1818년 봄에 집필을 완료한 뒤 가을에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고향집 ‘여유당’ 서재에 앉아서

책을 다시 한 번 수정한다.

이후 책을 짓게 된 동기와 책 내용을 요약한 서문을 썼다. 서문을 보면 목민심서가 어떤 책이고

왜 책을 저술했으며, 다산은 그 책이 어떻게 활용되기를 바랐는지 알 수 있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수신(修身)이요, 하나는 치민(治民)인데 치민이 바로 목민이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이 배우는 일이란 수신이 절반이 되고 그 절반은 목민하는 일이다.”

다산은 배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배워야 할 두 가지 길 중 하나인

 ‘목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밝히고,

어떻게 목민할 것인가를 위해 이 책을 짓는다고 밝혔다.

“성인의 시대는 멀어졌고 성인들의 말씀도 사라져 성인의 도가 어두워졌으니,

오늘날 목민관들은 오직 이익 탐하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 부양하는 일은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일반 백성들은 여위고 괴로우며 시들고 병들어 죽어가 구렁텅이를 가득 메운다.

그들을 양육한다는 관리들은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들만 살찌우고 있으니 왜 슬프지 않겠는가.”

즉, 백성을 살려낼 방법으로 목민관들의 행정 규범을 저술한 책이 목민심서다.

아울러 심서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도

“백성을 양육하고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야 있으나 몸소 실행할 길이 없어서 ‘마음으로 전하는 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로 서문을 마무리했다.

당시 지방 관리들이 전세(토지 소유세)와 공부(貢賦·세금 유형 중 각 지방 토산품을 거둬들이는 형태)를

제대로 처리할 줄 몰라 아전들의 농간에 휘말렸다.

그 결과,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었다.

다산은 자신이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군현에서 일어나는 실태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밝혔지만,

자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백성들이 착취와 탐학의 굴레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제시했다.

공평한 세금, 부패 없는 공납의 문제 해결은 당시 부정부패를 막아낼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쓰기 위해

 4서 5경을 연구하고 중국 23사 역사책, 국내 역사책, 선현들의 문집 등에서 옛날 목민관이 백성을 양육하는

기록을 골라 정리했다.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구성돼 있다.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며

5편에서 10편까지는 6전(典)에 관한 내용이다.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이다.

12편이 각각 6개 항목으로 구성됐으니 도합 72조항이며 총 48권으로 구성됐다.

첫 조항인 부임은 벼슬살이 시작부터 목민관이라면 지켜야 할 기본 행실을 설명한 부분이다.

해관에서는 벼슬을 그만둘 때 목민관의 처신에 대해 얘기했다.

12편에서 두 편을 제외한 10편이 목민관들이 실제로 실행해야 할 행정수칙이었으며

72조항 중 60조항은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목민관의 의무로 제시했다.

율기·봉공·애민 3편은 목민관 도리로서 반드시 행해야 할 기본 원칙이자, 3대 강령이다.

5편에서 10편까지 6편은 각론으로 행정 실무를 자세히 풀어 썼다.

5편은 이전(吏典)으로 조선 왕조 6조에서 이조(오늘날 내무부)에 해당하는 임무를 열거한 내용이다.

6편 호전은 호조(기획재정부)에, 7편의 예전은 예조(문화체육관광부), 8편 병전은 병조(국방부)에 해당된다.

 9편과 10편의 형전과 공전은 각각 형조(법무부)와 공조(국토교통부) 역할을 담당하도록 배열했다.

한 고을을 맡은 목민관은 관료의 한 사람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쥔 통치자와 같다.

그래서 다산은 “비록 벼슬 이름은 다르지만 목민관 직책은 옛날의 제후이다(부임 편, 제배조항)”라며

“나라에 6조가 있는 것처럼 고을에는 6전을 배치해 나라 다스리듯 고을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인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회갑을 맞는 해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란 이름으로 자서전을 썼다.

자신이 쓴 수많은 저서에 대해 간략하게 책마다 해설을 단 책이다.

‘목민심서’에 대해서는 “현재 법을 토대로 해서 우리 백성들을 돌봐주자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법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온 천하 백성이 편하게 먹고살 수 있는

부국강병 나라를 만들자는 ‘경세유표’와 달리

 ‘목민심서’는 백성 한 사람이라도 혜택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만들어진 책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와 목민심서
                

다산은 “백성은 토지를 밭으로 여기지만 아전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고 했다.

아전을 단속하고 감시하는 일이야말로 목민관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자 힘든 일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 아전들의 탐학한 악행이야말로 가장 큰 적폐였다.

 

아전들의 적폐만 제대로 청산해 백성들이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면

목민심서의 저술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법과 제도를 통째로 개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한 목민관도

최소한 공정성과 청렴성을 갖고 관행이나 읍례(邑例)라는 이름으로 쌓여 있는 적폐만 청산해도

백성이 큰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다산의 뜻이었다.

아전을 단속하는 문제는 바로 오늘날 공무원 부정부패를 막는 일과 비슷하다.

목민심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찾는다면 ‘공렴(公廉)’이라는 단어다.

 공직자들이 공(公)하고 염(廉)하기만 하면 목민심서에서 강조한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다산은 생각했다.

‘공’과 ‘염’이라는 글자가 지닌 뜻을 실제 행정에서 실천한다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다산은 28세이던 1789년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급제하고 집에 돌아와 지은 시에서 자신의 결의를 표명했다.

 ‘둔졸난충사(鈍拙難充使),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란 시였다.

“둔하고 졸렬해 임무 수행이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을 바치길 원한다.”

벼슬살이를 할 때도 ‘공렴’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안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했다.

공정·공평·공익만을 위해서 일하고 사(私)는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다산은 목민관 본무(本務)며 선의 근원이고 덕의 뿌리인 청렴이라는 도덕적 가치로 공직에 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목민심서는 모든 적폐를 공렴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옛 목민관 행정 사례이자,

다산 자신이 행했던 공렴한 목민관으로서의 실제 경험한 행정 업무를 소개한 책이라고 하겠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47호 (2018.02.28~2018.03.06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