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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20) 선조·광해군 외교 참모 이덕형

 

선조·광해군 외교 참모 이덕형

明·후금·일본 모두 탄복시킨 외교의 달인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북한과 미국의 긴장 관계,

해빙 국면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중국과의 관계.

현재 한반도는 만만찮은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비슷한 시기로 임진왜란을 겪은 후,

후금이 성장하면서 동북아 긴장 상태가 조성된 광해군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긴장 상태를 풀 수 있는 중요 해법 중 하나는 바로 외교 역량이다.

‘오성과 한음’ 일화로 잘 알려져 있는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년)은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시대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였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최대 국난을 겪은 선조 시대와 국제적 긴장감이 감돌았던 광해군 시대

전방에서 뛰어난 외교 역량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관료로서 이덕형이란 인물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당시에는 당쟁이 본격화되면서 학파나 정치적 계보가 뚜렷한 인물에만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이덕형처럼 당색이 뚜렷하지 않고, 관료적 성향이 강한 인물은 잘 다뤄지지 않았다.

 

이덕형은 장인이 북인 영수 이산해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당론(黨論)이 없었다.

서인, 남인 관료나 학자와 두루 교분을 형성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책무를 해결해나갔다.

 

이덕형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경기도 광주다.

시조 둔촌 이집은 고려 말 이색, 정몽주 등과 교유했던 학자였다.

18세 때 진사와 생원 양과에 합격하고, 20세에 부묘별시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배치됐다.

 

이덕형보다 3년 앞서 진사 시험에 합격한 이항복(1556~1618년)과 1580년 알성문과에 함께 급제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요직을 서로 주고받으며 30여년간 뜻을 함께했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전해오는 것은 어린 시절뿐 아니라 동문 급제한 후에도 오랜 우정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을 시작으로 당쟁이 본격 시작됐지만 이덕형은 당쟁과 거리를 뒀다.

관직 생활 초기 류성룡, 김성일, 이산해, 이원익 등과 친분을 맺으며 동인 쪽에 가까웠던 그는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후에는 남인과 북인 중도파였다.

하지만 시종일관 당 입장보다는 한 나라의 관료로서 능력을 발휘한 적이 많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덕형은 대사헌으로 재직하면서

좌의정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란 대책을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왜군이 대동강 인근까지 진격하자 이덕형은 적장 현소와 회담을 통해 선조가 피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임진왜란 초반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덕형은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 원군 파병 요청을 건의했다.

직접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로 가서 원군 출병에 큰 공을 세웠다.

또 당시 명나라 지휘관 이여송 접반사로서 임진왜란 동안 그와 줄곧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 4월 한양을 수복한 후에는 한양으로 돌아와 형조판서로서 한양 복구 활동에 전념했다.

 

1608년 선조 승하 후 이덕형의 외교적 역량은 더욱 빛을 발한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가장 큰 현안은 광해군 왕 책봉 문제였다.

선조 승하 후 조선 조정은 광해군 책봉을 청했지만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에게 형 임해군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책봉을 미뤘다.

 

이에 이덕형은 명나라 사신이 임해군을 면담하는 것을 반대하고, 직접 명나라로 가서 임무를 완수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덕형은 후금이 동아시아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상황을 광해군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1609년 9월 영의정에 임명되자, 이덕형은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내가 경에게 기대함이 강을 건널 때 필요한 배와 노 정도만이 아니다.

 

오늘날 국가 안위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경이 아니면 누가 될 수 있겠는가”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1년 만에

광해군 친어머니 문묘종사(공자를 모신 성균관 문묘에 학문이 뛰어난 조선의 학자를 배향함) 문제로

당대 최고 권력가인 정인홍과 갈등을 겪다 결국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이덕형이 52세가 되던 1612년 3월 황해도에서 봉산군수 신율이 김직재와 그 아들 김백함이 역모를 했다고

고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덕형은 사건을 조사한 후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이덕형의 조작 가능성 제기에도 불구하고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된 것은 물론이고

김제, 유열 등 100여명에 달하는 소북파 인사가 대거 숙청을 당했다.

소북파 외에 연루된 자들도 대부분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이나 서인이었다.

대북파 중심 이이첨은 오직 대북 세력만이 광해군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을 왕에게 강하게 심어줌으로써

대북 세력 독주가 시작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1612년 9월 이덕형은 이원익이 병으로 사직하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당시 우의정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이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점을 고려하면 이덕형은 영의정 직책 수행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1613년 4월에는 광해군 정국에서 가장 큰 사건이 발생했다.

문경 새재에서 살해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건 주범인 서양갑과 박응서의 공초(조선시대 형사 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초록해놓은 기록 문서)에서

놀라운 진술이 나왔다.

 

“거사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같은 진술 내용은 정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덕형은 이 사건이 이이첨의 사주로 인해 역모로 확대된 사건임을 파악하면서

이항복과 함께 영창대군 처형을 극력 반대했다.

 

이로 인해 이덕형은 대북파의 집중 탄핵을 받고

9월 관직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벼슬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는 형벌)을 당했다.

영창대군은 결국 강화도로 유배된 후 8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 무렵 이덕형 또한 병으로 고생을 하다 낙향한 지 한 달 만인 1613년(광해군 5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이덕형이 사망하자 광해군은 그의 관작을 모두 회복시키고 현직(영의정) 예우로 장례를 치르게 했고,

그의 영전에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애도했다.

“덕형은 양근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죽다’의 완곡한 표현).

덕형은 일찍부터 공보(公輔)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했으나,

 덕형이 관직에서는 가장 앞서 나이 38세에 이미 재상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난리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모두 그의 명성에 복종했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을 좋아하지 않아, 장인 이산해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했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했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했다.” (광해군일기, 1613년 10월 9일)

 

이덕형은 조선 중기 외침이 잦고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격변기에 정승을 여러 차례 맡아

국정을 이끌어갔다.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서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임진왜란 때 명과 일본 진영을 오가며 사신으로서 일본 적장들과 강화를 교섭했고,

명나라 지원군 파견을 요청해 성사시켰다.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를 조달하고,

훈련도감에서 병기 제작을 감독하면서 산성을 수축해 왜와 여진족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도 대마도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으며 지방관 업무를 겸직해 맡은 임무에 충실히 수행했다.

 

광해군 즉위 후에도 원익, 이항복 등과 함께 전쟁 복구와 국방·외교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실무 관료로 활약했다.

광해군 책봉을 실현시킨 것이나

조문과 책봉 사절로 온 명나라 사신 접대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선조, 광해군대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당파 간의 대립이 치열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덕형처럼 관료적 자질을 바탕으로

국정 수행에 능력을 발휘하는 관료들이 다수 배출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국내외적 상황이 어려웠던 조선 중기, 균형 있는 정치 감각과 뛰어난 외교 역량을 보였던

이덕형은 현시점에도 가장 필요한 유형의 인물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