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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조선의 '천재 시인' 윤선도


조선의 '천재 시인' 윤선도


힘든 세월 견뎌내고 시가 문학 최고봉으로
65살 때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 지어


 


― 고산 윤선도 표준영정 ―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

송강(松江) 정철(1536~1593)과 함께 조선 시가(詩歌) 문학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주옥같은 우리말 시조를 많이 남겼다.

하지만 세 차례에 걸쳐 15년 가까이 유배되는 등 정치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다.


그의 흔적이 깃든 전남 해남과 완도 보길도를 찾았다.

해발 381m의 덕음산(德陰山)이 병풍처럼 두른 전남 해남 연동마을은

해남 윤씨 집안이 500년 넘게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다.

'덕의 그늘이 드리운' 산발치에는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인 '녹우당'(綠雨堂)이 자리한다.


집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떠받치듯 높이 솟았다.

녹우당이란 이름은 이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집 뒤편 대나무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표현한 것이란 설명도 있다.

덕음산과 고택, 은행나무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해남 윤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고산의 고조부인 어초은 윤효정(1476~1543) 때다.

조선 전기의 문신 최부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강진에서 해남을 오가다

해남의 대부호인 정귀영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면서 해남에 살게 됐다.

터가 좋은 데 살아야 인물이 나온다는 생각으로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백련동(지금의 연동)을 발견하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


고산의 13대손(孫)인 윤영진 문화관광해설가는

 "어초은 할아버지가 1400년대 후반에 최고 명당에 터를 잡은 후 500년이 넘게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며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등 걸출한 인물이 나왔고,

지금도 해남 윤씨 후손은 사회 각계에서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녹우당 사랑채 ―



◇ 99칸 위용 자랑했던 고택 '녹우당'

고산은 선조 20년(1587) 한양 낙산 서편 연화방(지금의 대학로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서 있는 '오우가'를 새긴 비(碑) 측면에는 '고산 윤선도 생가의 터'가 새겨져 있다.

서울 토박이인 고산은 어떻게 남도의 끝자락에서 살게 됐을까.


해남 윤씨 집안은 어초은 윤효정, 윤구, 윤홍중으로 대가 이어졌는데

윤홍중에게 아들이 없자 당시 관례에 따라 차남 의중의 둘째 아들 유기(고산의 작은아버지)로 대를 이었다.

그런데 유기에게도 후사가 없자 할 수 없이 형 유심의 둘째 아들인 선도를 양자로 입양했다.


여덟 살인 고산은 졸지에 해남을 종가로 하는 가문을 이끄는 대종이 됐다.

고산은 작은아버지의 집이 있던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살다가 25세에 처음 해남 종가를 찾았다고 한다.

명동성당 맞은편 YWCA 건물 바로 옆에는 고산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또 하나 서 있다.


녹우당은 원래 1만 평 부지에 99칸으로 건축됐지만 현재 55칸만 남아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대표적인 건물인 사랑채가 나타난다.

임금이 된 효종이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고산을 가까운 곳에 두기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하사한 것을

1668년 인천을 거쳐 배에 실어 옮겨왔다고 한다.


윤영진 해설가는 "사랑채에서는 궁중의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며

"빛이나 비를 막는 차양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랑채 앞에 기와를 얹은 지붕을 별도로 설치했고,

기둥은 궁궐이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것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녹우당은 고산의 증손자이자 조선 최고의 화가로,

강렬한 인상의 '자화상'(국보 240호)을 남긴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흔적이 남겨진 곳이기도 하다.

사랑채에는 공재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써준 '녹우당',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쓴 '靜觀'(정관) 현판이 걸려 있다.

 '정관'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뜻이다.

'芸業'(운업)이란 현판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로 해석된다.


사랑채 뒤편에는 ㄷ 자의 안채가 자리한다.

안채의 겹처마와 지붕 위로 솟은 부엌 상부의 환기용 구조물도 전통 양반 가옥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다.

안채 가운데에는 작은 화단이 조성돼 있다.


500년이 넘은 이 건물에서는 현재 종손인 윤형식(85) 옹 내외가 거처하고 있다.

해방 이후 큰형이 사망하며 졸지에 종손이 된 그는 40대 초반 종가를 지키기 위해

사회생활을 접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는 "호남 3걸로 문장이 뛰어났던 귤정 윤구, 고산, 공재 등이 남긴 무수히 많은 고문헌과 고문서를 정리하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며

"이제 조상이 남긴 유물에 대한 문호를 활짝 열어 빛을 보게 하고 싶다"고 했다.




―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



◇ 사철 푸른 비자나무 심은 까닭은


녹우당을 나와 덕음산 쪽으로 돌담을 따라가면

안쪽에는 영조 3년(1727)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된 고산사당이 있다.


보통 제사는 4대까지 집에서 지내고 5대부터는 시제로 모시게 되어 있다.

불천지위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의 신위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영구히 사당에서 모시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6월 11일 고산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고산사당에서 발걸음을 옮겨 어초은사당을 지나 초록빛 나무가 울창한 숲길 안쪽으로 들어서면

해남 윤씨 번성의 기틀을 닦은 어초은의 묘가 자리한다.


녹우당이나 마을에서 덕음산 중턱을 보면 그늘이 드리운 듯 유독 진한 초록빛 나무 무리가 눈에 띈다.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며

고산이 사철 푸른 비자나무를 심은 것이 현재 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연동마을 입구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서는 고산, 공재 등이 남긴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고산의 '금쇄동집고'(보물 제482-1호), '산중신곡'(山中新曲, 보물 제482-3호)과 공재의 '자화상'과

 윤용의 '미인도',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고려 공민왕 때 노비 상속 증서인 '지정 14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등

 해남 윤씨가 남긴 유물과 고문서, 그림 등 2천5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고산이 대종을 잇기 위해 양자가 되는 것을 예조에서 허락한

 '고산양자 예조입안'(보물 제482-5호), 고산이 거문고 제작법과 사용방법을 수록한 '회명정측'과

이를 토대로 제작한 거문고는 흥미롭다.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다는 거울도 볼 수 있다.




― 금쇄동 윤선도 묘소 ―


◇ 은둔하며 창작활동 했던 '금쇄동'


고산의 행적을 기록한 '고산연보'(孤山年譜)에 따르면

고산은 "용모가 단정하고 안색이 엄숙하고 굳세어 대하는 사람이 바로 볼 수가 없고,

쏘아보는 눈빛이 섬연하다"고 묘사돼 있다.


유물전시관에 있는 표준영정 속 고산의 모습이 꼭 그렇다.

그는 용모처럼 성격도 강직하고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 탓에 고산은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다.


고산은 30세에 당시 최고 권세가인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규탄하며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이듬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돼 6년을 더 귀양살이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51세에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강화도로 갔지만 문안하지 않고 뱃머리를 돌렸다는 이유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된다.

시련은 말년까지 이어져 74세에 서인과 대립하다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고,

79세에 광양으로 이배돼 81세까지 귀양 생활을 한다.


연동마을에서 남서쪽으로 10여㎞ 떨어진 곳에 있는 금쇄동(金鎖洞)은

영덕 유배에서 돌아와 심신이 지쳐있던 고산이 54세에 들어와 은둔하며 창작활동을 한 곳이다.

고산은 꿈에 자물쇠가 잠긴 상자를 얻고 며칠 후 발견했다고 해서 '금쇄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고산은 금쇄동에 대해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숨겨온 여기/ 그 누가 알까 비기 속의 선경인 줄을/

옥처럼 깎아지른 신선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달과 해가 절벽을 엿보고/ 바람과 비는 평원에 그득/ 지난밤 꿈 신기하기도 하네/

옥황상제는 무슨 공으로 내게 석궤를 내리시나"('고산유고' 중)라고 읊었다.


고산은 이곳에 원림을 조성하고 회심당, 불훤요, 휘수정 등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길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고전 시가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인 '오우가'가 탄생했다.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의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야 무엇하리

('산중신곡' 중 '오우가' 첫 구절)


금쇄동은 현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종가의 허락을 얻어 들어간 금쇄동은 조용하게 산책을 즐기기에 좋았다.

탐방로를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제사 준비를 위한 제각이 있고, 왼쪽으로 오르면 고산 신도비가 있고,

조금 더 가면 1671년 85세에 세상을 떠난 고산이 잠들어 있다.

금쇄동 정상에서는 두륜산과 달마산, 월출산과 남해가 건너다보인다.

정상에는 또 축성 시기를 알 수 없는 길이 1.5㎞의 산성 흔적이 있다. 


 


― 보길도 세연지 ―

◇ 어부사시사 탄생한 '고산의 정원' 보길도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 태종이 이끄는 대군이 한양을 향해 급속도로 진격해 오자

인조는 먼저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따라가려 했으나 길목이 막혀 자신은 남한산성에 갇혔다.

인조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40일을 버텼지만

결국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당시 해남에서 칩거하던 윤선도는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자제와 가복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다.

도중에 강화도가 함락됐고, 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통해하던 고산은 그 길로 뱃머리를 제주 쪽으로 돌렸다.

남쪽으로 가던 고산 일행은 풍랑을 만나 어느 섬에 머물게 됐다.

섬의 절경에 반한 고산은 그곳에 눌러앉게 됐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보길도다.


고산은 산세가 연꽃을 닮았다 해서 아랫마을을 부용동이라 이름 지었다.

곳곳에는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는 등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었다.

고산은 1637년부터 세상을 떠난 1671년까지 부용동을 수차례 드나들며

약 13년을 머물렀다.


부용동에서 가장 먼저 방문할 곳은

원림 입구에 있는 세연정(洗然亭).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 있다.

부용동 깊숙한 곳에 있는 격자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지하를 통과해 이곳 부근에서 솟아올라 주변 지류와 합류하는 곳으로,

고산은 이곳에 물막이를 조성해 연못을 만들었다. 또 커다란 돌로 대를 쌓아 정자를 지었다.


연못은 멈춘 듯 수면이 고요하다.

다섯 곳에 흡수구를 만들고 배출구 셋을 조성해 물이 흐르면서도 고요히 머무는 것처럼 설계했다고 한다.

황소가 힘차게 뛰어가는 것 같은 혹약암(惑躍岩) 등 연못에 놓인 커다란 바위 7개도 볼거리다.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못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판석보도 흥미롭다.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1748년 보길도를 답사한 후 기록한 '보길도지'에 따르면

고산은 "당 위에서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고, 동대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건너편 산인 옥소대에서

긴 소매 차림으로 춤추게 했다"고 한다.


세연정 남서쪽 격자봉 아래에는 고산의 서재이자 거처인 낙서재가 말끔하게 복원돼 있고,

그 아래에는 아들 학관이 머물던 곡수당이 있다.

낙서재에서 보면 맞은편 봉우리 중턱에 동천석실이 건너다보인다.

고산이 부용동 제일의 명승이라 했던 곳으로 이곳에서는 연꽃에 파묻힌 부용동이 내려다보인다.


고산은 65세인 1651년 이곳에서 우리나라 시가 문학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연시조 '어부사시사' 40수를 지었다.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松竹) 두어 집이 냇속에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어부사시사 '춘사' 4수)




― 낙서재 맞은편 봉우리에 있는 동천석실 -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