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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이순신·권율 천거한 왜란극복 최고 공신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임진왜란을 극복한 최고 영웅 하면 당연히 이순신 장군(1545~1598년)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순신을 천거하고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전쟁 현장에서 중요한 상황을 판단했던 류성룡(1542~1607년)의 역할도 매우 컸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임진왜란을 경험한 류성룡은 1598년 11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쳐 전개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전황, 상황에 대한 반성 등을 자세히 기록해 끝까지 공직자의 책무를 다했다.

징비록에서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문장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즉 “나는 미리 징계해 후환을 조심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류성룡은 스스로 쓴 서문의 첫머리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썼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저술했음을 밝힌 것이다.

 

이어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책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목숨을 부쳐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왕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아니겠는가”라고 반성했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은 징비록 외에도

오희문의 ‘쇄미록’, 정경운의 ‘고대일록’, 이노의 ‘용사일기’, 조경의 ‘난중잡록’ 등 여러 기록이 많다.

그럼에도 류성룡이 전란 당시 좌의정과 병조판서, 영의정, 도체찰사 등 최고 직책을 맡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징비록의 가치는 매우 크다.

 

전쟁의 구체적인 전개 상황과 명나라 군대의 참전과 강화 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 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위치에서 저술한 기록이란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류성룡이 조정의 여러 공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객관성과 신뢰성이 큰 자료다.

 

징비록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상, 이순신, 신립, 원균, 이원익, 곽재우 등 전란 당시 활약했던

인물의 공적과 인물평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징비록이 처음 출간된 것은 1633년(인조 11년)으로,

아들 유진이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을 간행하면서 그 안에 수록했다.

 

 이후 1647년 그의 외손자인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16권으로 구성된 징비록을 세상에 내놨다.

징비록의 가치는 일본에도 알려져

1695년 일본 교토에서 간행된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특히 2015년 KBS에서

대하 사극 ‘징비록’을 방송하면서 류성룡과 징비록에 대해 더욱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된다.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년) 외가인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서울에 올라와 남산의 묵사동, 현재의 남산 한옥마을 인근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 가을에 향시에 급제했고,

19세에는 관악산에서 맹자를, 20세에는 고향에 돌아가 춘추를 읽었다고 연보에 기록돼 있다.

 

1562년 21세 때, 안동의 도선에서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근사록’ 등을 배웠다.

1564년 7월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으며 1565년 성균관에 들어갔다.

 25세가 되던 1566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진출해 1567년 8월에는 예문관 검열이 됐다.

 

선조가 1567년에 왕위에 오른 점을 고려하면

류성룡은 선조와 관직 입문 동기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인연이 깊었다.

이후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1589년 이조판서를 지내는 과정에서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의 여파로 동인 내에서 당파가 분리됐다.

 

이때 이발과 정인홍, 이산해가 중심이 된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가 된다.

이후에도 정인홍과 이산해와는 정치적으로 계속 대립했다.

1590년 5월 우의정에 올랐으며, 1591년 좌의정으로서 이조판서를 겸하면서 선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로 꼽힌다.

이때 류성룡은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하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권율의 활약을 보면 인재를 알아보는 류성룡의 안목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좌의정과 병조판서,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류성룡은 조선이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을

진관체제(鎭管體制·자연 향토 단위의 소규모 방어 위주의 전략)를 버리고

제승방략(制勝方略·자연 향촌 단위의 군사를 군사거점이나 집결지에 모은 뒤, 서울에서 장수가 내려와 이들을 지휘)

체제를 고수한 것에서 찾았다.

 

류성룡은 진관 제도의 정비를 건의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제승방략을 갑자기 바꿀 수 없다”는 반대 논리에 막혀 폐기됐다.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신립 장군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다.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계략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 생각해 상세히 적어둔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피난을 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놓고 또 신의주까지 들어간다면 다시는 서울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류성룡은 말을 하면서 목이 메었고 눈물을 흘렸지만 선조는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류성룡은 순찰사 이원익 등과 함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이후 류성룡은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계획했다.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 후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講和)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왜군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했다.

 1594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전수기의십조(戰守其宜十條·전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 등을 올리면서

전쟁 대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에도

류성룡은 왕명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을 순시하면서 전쟁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서애집에는 이런 류성룡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정유년에 적이 다시 준동해 양호가 와해됐고, 9월에는 한양 변두리를 핍박했다.

 나(류성룡)는 임금의 명을 띠고 한강 방면을 순찰하며 경기 우방어사 유렴(柳濂)으로

안성, 죽산, 양성, 용인, 양지, 진위 등의 군사를 감독 통솔해 양성의 무한산성을 지키도록 했다.

(중략) 한강 연안 일대를 왕래하면서 얕은 여울의 경비를 각각 책임지우고,

군령장(軍令狀)을 줘서 조금이라도 그르침이 있으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했다.”

 

이후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와 지휘관 양호 사이에 내분으로 소위 ‘정응태 무고 사건’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류성룡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바랐으나, 류성룡은 이항복과 윤두수를 추천했다.

여정이 먼 중국 사신 길이 부담스럽고 명나라 내분에 휩쓸리면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돼 같은 해 11월 19일 마침내 파직된다.

공교롭게도 1598년 11월 19일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기도 했다.

파직 후 류성룡은 1599년 2월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왔고,

형 유운룡과 옥연정사에서 뱃놀이를 하는 등 오랜만에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징비록 집필에 들어갔다.

 

1604년 7월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됐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로 집필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607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각각 류성룡의 공과(功過)에 대해 기록돼 있다.

 “국량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해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는 등

부정적 언급이 유독 많았던 것은 실록 편찬이 류성룡 반대 세력에 의해 기록돼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선조실록은 북인의 관점에서,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의 관점에서 기록돼 남인의 영수인 류성룡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인색한 것이다.

피난을 간 선조를 대신해 전시 정부 최고의 참모로 활약한 류성룡과 그가 남긴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의 기록,

징비록은 위기의 시기 참모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