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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2) 목민심서 ‘부임’편 6가지 덕목


(2) 목민심서 ‘부임’편 6가지 덕목

지방관리를 ‘목민관’이라고 부르는 이유





목민심서 12편의 제1편은 부임이다.

목민관인 지방관은 요즘처럼 국민투표로 선출하는 제도가 아니라 국왕이 직접 임명했다.

지방자치제도가 정착되기 전인 1995년 이전에는 도지사·시장·군수 등을 모두 정부에서 임명했으니

그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목민관은 임금의 명을 받고 현지에 부임했다.

1편(부임)에는 6개 조항이 있다.

첫 번째 조항은 바로 임금의 임명 절차인 ‘제배(除拜)’다. 제배는 임명장을 받는 일을 뜻한다.

임금이 제수(除授)해준다고 해서 ‘제배’는 ‘제수’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옛날이나 지금 모두 목민관인 지방관에 임명을 받으려면 지방관을 하고 싶은 사람이 당연히 엽관운동을 벌인다.

선거를 통해 지방관이 되는 요즘으로 보면 선거운동을 통해서 자기를 뽑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과 같이

자기를 임명해줄 것을 바라는 엽관운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다.

목민심서 48권 중 제1편 제1조항인 ‘제배’에서 다산의 주장은 역시 색다른 주장으로 첫 줄을 기록했다.

“다른 벼슬이야 하고 싶으니 임명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나,

목민관인 지방관만은 시켜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他官可求 牧民之官 不可求也).”

목민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한마디로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중앙이나 지방을 가리지 않고 모든 벼슬아치는 목민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앙 공무원은 공무원이라고 말하지만 지방을 책임지는 공무원은 목민관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중앙이나 지방 공무원은 모두가 차이 없는 공무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방에는 목민관 한 사람만 관(官)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전들이 실무 행정을 집행하고 있었다.

즉, 목민관만이 정식 공무원이라 할 수 있다.

목민관은 원님이나 수령(守令)이라고 부른다.

현령·현감·부사·목사 등 지역의 크고 작음에 따라 혹은 그 지역의 중요도에 따라 직급의 차이는 있었다.

모두 맡은 지역의 입법·사법·행정 3권을 행사하는 권한이 있으니 그에 따른 책임도 막중했다.

중앙 공무원인 벼슬아치들이야 맡은 직무만 성실하게 수행하면 별 탈이 없겠지만,

수령만은 권한이 막강한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크다.

“수령은 만백성을 주재하니 정치상 온갖 중요한 기능을 수행함으로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일과 같은 임무다.

따라서 목민관은 모두 제후(諸侯)와 같다.”

다산은 목민관에 대해 한 나라의 제후, 곧 임금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위치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중요한 자리고 책임이 무거운 직책인 만큼

수령만은 본인이 직접 시켜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목민관은 재주와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사람 중

중앙 중신 등에 의해 추천을 받은 사람만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다만 다산은 예외적으로 자천에 의한 임명의 길을 열어놨다.

다만 한 고을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이끌 확실한 자신이 있고 주변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만 해당된다고 했다.

‘부탁하지 말고, 고마워하지 말고, 거절하기.’

목민관은 능력이 안 되면

부탁하지 말고 임명된다고 해도 자식과 부모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니 고마워하지도 말아야 하며 능

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거절하라는 내용이다.

정리하면 다산은 목민관이야말로 자신이 직접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춘 능력자가 추천을 통해 임명돼야 막중한 책임을 완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신중하게 인물을 골라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제배에서 다산이 특별하게 언급했던 내용이 있다.

중앙에서 임명 절차가 이뤄지면 부임 전 해당 고을에 부임 사실을 알려준다.

이때 부임 시 발생하는 교통비, 동원 인력 등 모든 비용을 중앙에서 지급한다.

이 때문에 해당 관청에 부임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미리 전하면 백성들이 크게 환대할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많은 수령들은 모든 비용을

중앙정부에서 담당해줬음에도 상습적으로 부임 준비를 해당 고을에 맡겼다.

이 과정에서 개인 착복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을 때 비로소 목민관으로서 위엄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목민관의 위엄은 청렴에서 나온다.”

다산이 남긴 명언 중 하나다.

두 번째 조항은 치장(治裝)이다.

목민관에 임명돼 부임하면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타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다.

다산은 부임을 위해 떠날 때

의복은 평상시 입던 대로 하고 말이나 가마 등 꾸밈 또한 평상시와 꼭 같도록 하라고 했다.

“백성에 대한 애정은 절약해서 쓰는 데 있다. 절약해서 쓰려면 검소해야 한다.

검소하게 생활할 수 있어야 청렴해지고 청렴한 뒤라야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생활이 목민하는 데 가장 힘써야 할 일이다

(愛民之本 在於節用 節用之本 在於儉 儉而後能廉 廉而後能慈 儉者 牧民之首務也).”

다산은 옛날의 어진 목민관들이 얼마나 검소했는지를 열거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뒷날 참판 벼슬을 지냈던 유의라는 분이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 목사로 재직할 때 일이다.

찢어진 갓과 성긴 도포에 찌든 색깔의 띠를 두르고 조랑말을 탔으며

이부자리는 남루하고 요나 베개도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위엄을 세우자 가벼운 형벌 한번 시행하지 않았으나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숨을 죽였다.

그때 나(다산)는 홍주목 예하 벼슬인 금정찰방으로 있어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다.”

또 다산은 “이불이나 침구, 솜옷 이외에 책 한 수레를 싣고 간다면 맑은 선비의 소지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지에 책을 한 수레 갖고 가는 목민관, 얼마나 멋진 목민관인가.

사조(辭朝)와 계행(啓行)이라는 조항도 빼놓을 수 없다.

사조란 임명된 관원이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는 절차다.

사조를 설명하면서 다산은 자신의 경험담 하나를 적어놨다.

정조 21년인 1797년 여름, 자신이 곡산도호부사로 임명을 받고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릴 때다.

임금이 “내가 특별명령으로 너를 임명했으니 가서 잘해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 말씀에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는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기록했다.

계행이란 부임하는 행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임하는 길에는 무엇보다도 엄하고 온화해 과묵하기를 마치 말 못하는 사람처럼 처신하라

(啓行在路 亦唯莊和簡默 似不能言者)”고 했다.

다산은 좋은 벼슬에 올랐다고 경솔하거나 건방 떠는 일이 없이 위엄이 있지만

온화한 모습과 과묵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권했다.

부임편 다섯 번째 조항은 상관(上官)이다.

상관이란 취임과 같은 말로 임명을 받아 맡은 지역에 부임해 목민관으로 취임하는 일이다.

맨 먼저 지킬 일은 취임 날짜를 미리 예정하거나 날짜를 택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도착하는 날 취임하면 되지,

 날짜를 미리 예정하고 취임식을 거행해 실속 없는 허세를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취임하면 곧바로 하급 관리들의

참알(새로 벼슬을 받은 중하급 관원들이 상급 관청을 방문해 인사하는 의식)을 받아 소속원과 인사를 통해

그들과 소통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관리들과 인사를 마치고 나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다산은 한 고을 지도자인 목민관이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제시했다.

“참알하고 관리들이 물러가면 백성을 보살펴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너그럽고 엄숙하고 간결하고 치밀하게 규모를 미리 정해야 한다.

오직 그 당시 형편에 가장 적합한 내용으로 정하고 굳게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

또 다산은 고을의 공자묘(孔子廟)인 향교(鄕校)를 참배하는 일로 ‘상관’의 업무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