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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사적 제399호) 한강 변 양화나루 절두산 순교성지

 

한강 변 양화나루 절두산 병인박해 순교성지

사적 제399호

 

어디 :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은 한강 변 최고의 절경으로 유명하며 누에가 머리를 쳐든 형상으로 잠두봉으로 불렸는데,

절두산으로 명명된 유래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진까지 진격해온 적이 있는데 이에 흥선대원군이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의 물을 서학(西學)무리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 양화진 잠두봉에서 목을 잘랐다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 사적지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며,

1997년 11월 7일 양화나루터와 잠두봉이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팔마를 든 예수상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상

 

 

아주 크고 긴 칼이 전시되어 있음이 이곳에서 목 베임을 당한 의미인 것 같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 방문 기념 1984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像

 

 

 

 

 

 

척화비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하응 고종의 아버지)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내용입니다.

 

초봉헌대

 

 

 

 

성모 마리아 상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약 100년간에 걸쳐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공경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상으로,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가족 순교자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의송과 그의 처와 아들을 형상화한 작품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병인박해기념성당

 

 

 

 

예수의 상

 

 

박물관

제3회 카톨릭미술공모전 수상작 전시전(하나님의 종 125위)

촬영금지로 작품은 몇개만 올립니다.

 

125개의 조각으로 만든 십자가

 

 

125개의 촛불

 

 

외국의 성당과 풍경

 

 

 

 

 

이곳은 병인박해 때의 감옥과 형틀 체험장

 

 형구돌(形具石)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형구

 

 

김대건 신부가 집필한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

초대 한국인 성직자인 김대건(1821~1846)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 밀사의 도움을 받아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

이때 김대건은 현석문. 이재의 등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를

라틴어로 작성하였는데 그들의 약전과 형벌에 대한 자세한 설명 및 삽화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 신부들의 복음전파를 위한 변장복장으로, 초상을 당한 사람의 복장을 하였음.

 

 

 

 

 

여러가지 형틀

 

 

 

 

 

 절두산 순교기념비와 성당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선 가운데 자리잡은 '큰칼' 모양의 작품은 주탑(主塔)이며,

주탑의 정면에서 우측탑(右側塔)에는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있고,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이곳에서 순교했을 또다른 무명순교자들을 조각을 했고

주탑과 우측탑에는 모두 33명의 순교자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