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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아산) 사적 제155호 62년 만에 방문한 현충사

 

62년 만에 방문한 현충사(顯忠祠)

사적 제155호

 

 

어디 :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현충사를 방문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의 정신과 구국 위업에 대해 참배하였을 것이나,

나는

부끄럽게도 62년 만에 처음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나

햇수로는 두 번째 방문이 되었는데

첫날

방문한 날은 월요일이라 헛걸음하고 두 번째 방문하여 참배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방문 때 찍은 문 닫힌 현충사

 

 

 

 

 

충무공 기념관의 바깥을 잔디로 입힌 이유는

본전 앞에 건물이 서면 본전에서 본 확트인 곳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충무공 기념관에서 본 노량해전을 영상물로 보여주는데 아주 유익하며 입체영화여서

 어르신이나 어린이와 함께라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충무공께서 왜놈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시는 장면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이 태종실록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이후 임진왜란을 앞두고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장군이 만들면서 부터이며

난중일기에 거북선은 1592년 2월 전에 완성되어 늦어도 전쟁이 일어나는 4월에는 화포사격 연습까지 마쳐

실전에 배치될 만반의 준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충무문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세워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걸어 후세 사람들도

본받게 했던 것인데, 충무공 집안에서는

 네 분(충무공, 조카 완, 4대손 홍무, 5대손 봉상)의 충신과 한 분(8대손 재빈)의 효자의 편액이 모셔졌습니다. 

 

 

정려 내역

 

 

계절은 이미 여름에 들어섰는데 주황과 하얀 철쭉이 봄의 절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반송은 처음 보았습니다.

 

 

홍살문

일반적으로 홍살문은 입구에 세우는데

현충사 홍살문은 본전 앞에 세워져 있어 특이합니다. 이유가 있을 터인데.

 

 

충의문

 

 

본전(本殿)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년 민족성금으로 중건된 구본전을 유물관 옆으로 이전하고

1967년 새로이 건립하였으며,

묘소는 이곳에서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난중일기(국보 제76호)

임진왜란이 일어나 해인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 진중 생활을

충무공이 기록한 일기

 

임진장초(국보 제76호)

충무공이 임진왜란 중 주요 전투의 출전 경과와 전과 보고를 비롯 일본군의 정세, 군사상의 건의,

수군 진영의 현황을 조정에 보고한 문서인 장계를 다른 사람이 옮겨 적은 것.

 

충무공 서간첩(국보 제76호)

충무공이 현건과 현덕승 두 사람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 6편을 묶은 책.

 

무과급제교지(보물 제1564-7호)

충무공이 1576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합격증. 충무공은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였는데

이해 전체 29명 중 12등에 해당.

 

사부유서(보물 제1564-4호)

충무공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될 때 받은 유서(諭書)-명령서

 

이충무공전서

정조의 명으로 충무공의 일기.장계.시.편지 등 각종 글이나 임금이 내린 각종 문서와 행록, 행장,사장 등

제3자가 쓴 글들까지 모두 모아 1795년 간행한 책으로, 정조는 이 책을 위해 개인돈(내탕금)까지

주었다.

 

충무공 장검및 유물 일괄(보물 제326호)

충무공이 1594년 4월 한산도에 머물 때 만든 칼로, 길이 197.5cm, 무게 4kg이 넘어

전장에서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마음을 다다듬으려는 것인데, 두 칼날에 친필 글씨와

칼자루 속에 甲午四月日造太貴蓮李戊生(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는 글귀가 있음.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본전에서 바라본 현충사 앞 전경

 

 

단풍나무에 예쁜 꽃이 달렸습니다.

 

 

 충무정(忠武井)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족들이 쓰시던 우물

 

 

옛집

무공이 21세 때 혼인하여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아 32세 때 무관에 급제하기까지 살았던

 집으로 종손이 대대로 살았으며

 집 뒤편에는 충무공 위패를 모신 가묘(家廟)가 있어 매년 기일(음 11월19일)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옛집 뒷뜰에 모란이 곱게 피었군요.

 

 

옛집 내부

 

 

은행나무

이 두 그루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살이 넘은 것으로, 아마도 이충무공이 장가 들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운구가 이 집 앞을 지나 장지로 가는 것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활터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녁과의 거리는 145m이며,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구본전

이 구본전은 1704년 이충무공의 공덕을 길이 받을고저 아산 지방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32년(1706)에

서원 형식의 사당을 세웠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현중사도 없어지게 되었으나 1932년 6월5일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민족성금으로 이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1966년 4월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의해 본전이 새로 세워짐에 따라 1968년 9월 9일 지금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전된 것이다.

 

주련(柱聯) 

주련은 위당 정인보선생이 쓰신 글

 

一誓海山立綱常於百代(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 천지를 구해냈으되 내세워 자랑함이 없네

成仁取義精忠光於檀聖(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 일을 이루고 의를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補天欲日功德盖於槿邦(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곳으로, 1706년(숙종 32)에

 아산 지역 유생들이 조정에 청하여 세운 사당이며, 1707년 숙종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현충사는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었고, 1931년 충무공 종가 집이 어려워 충무공 묘소와 위토가 은행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모여 묘소와 위토를 되찾고, 1932년 다시 현충사를 세웁니다.

해방 후 1960~70년대 현충사성역사업을 통해 재정비 되었고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