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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예산) 수덕사와 이응로 선생 사적지 수덕여관

 

수덕사와 이응로 선생 사적지 수덕여관

 

 

어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17-1

 

수덕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의 초가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수덕여관입니다.

 

 

 

 

 

 

 

 

 

 

 

고암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뒤 1969년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수덕여관 뒤뜰 바위에 새긴 암각화

 

 

 

 

 

 

 

 

 

 

 

 

 

 

수덕여관은

 고암이 1944년에 구입했으며, 이후 15년간 이 곳에 머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은 작품을 다수 남겼고,

1958년 고암이 젊은 연인과 프랑스로 떠나자 본부인인 박귀희여사가 식당과 여관으로 운영하다가

2001년초 박귀희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후 방치되다가 수덕사가 구입을 합니다.

 

 

수덕여관은

구한말 신여성 3인방이라 불리는 윤심덕, 나혜석, 김일엽 중 나혜석과 김일엽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였고

김일엽은 그 시절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유연애를 하던 여류문인이셨습니다.

 

훗날 김일엽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의 제자로 승려가 되었고,

김일엽의 친구인 나혜석 또한 승려가 되고자 이곳 수덕여관에 머물며 5년간이나 만공스님께 간청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해

이곳 저곳으로 떠돌다 이름도 없이 쓸쓸한 생을 마감한 여인입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 때

고암이 이곳을 드나들며 나혜석과 인연을 맺어 프랑스로 유학의 꿈을 갖게 되었으며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자

고암이 1944년에 수덕여관을 사들였습니다.

 

 

1958년 고암이 젊은 연인과 프랑스로 떠나 생활하던 중

이른바“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자

박귀희여사는 한결 같은 지극정성으로 고암의 옥바라지를 하고, 출옥 후 고암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머무는 동안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며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립니다. 박귀희 여사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렸으나,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후

수덕여관은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으로 자리잡았으나

2001년초 박귀희여사가 세상을 뜨자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고

그 후 수덕사에서 매입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덕숭선문

 

 

 

 

 

부도비

 

 

수덕사 성보박물관(세계일화-만공스님 친필)

 

 

 

 

 

 

 

 

 

 

국보 제40호 수덕사 대웅전

 

 

 

 

 

경내모습

 

 

견성암(비구니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