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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구(舊)러시아공사관

구(舊)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언제 :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어디 : 서울 중구 정동 15-1번지

 

예전 고등학생때 구MBC와 피어선학교 뒷편 언덕에 특이하게 생긴 하얀 건물이 충정로에서 보였는데

지금은 고층건물들에 의해 보이지 않지만, 그 특이한 건물이 바로 구러시아공사관 건물입니다.

특히

이곳은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세자와 함께 옮겨와 다음해 2월 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還宮)할 때까지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무대로 역사적 의의가 큰 건물입니다.

 

 

 

 

러시아공사관은

 덕수궁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하여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에 주탑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다가 1973년에 복구되었습니다.

 

구러시아공사관 문화재 사진

구(舊)러시아공사관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며

이 기간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2층에는 창문을 하나만 내었고

3층에는 각면에 2개의 반원 아치형의 창문을 만들었고

지붕은 삼각형 페디먼트(Pediment)로 구성되었습니다.

현재

탑의 동북부의 지하밀실의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지하밀실은 비밀통로로 경운궁(덕수궁)과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정동공원

 

 

 

 

 

 

 

 

아관파천(俄館播遷)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민비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에게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간 피신생활을 하며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탑의 정면 하단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의식이 각성되었으나,

이와 같은 움직임도 왕실과 보수집권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구러시아공사관 언덕 아

(정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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