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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북 여행

(보은) 두 왕이 다녀간 속리산 복천암(福泉庵)

 

두 왕이 다녀간 속리산 복천암(福泉庵)

 

 


 

 언제 : 2019년 2월 9일 토요일

어디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


 

복천암은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복천암은

고려 시대에는 공민왕이 자주 머물다 갔고, 조선 시대에는 세조가 머물다 갔다.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복천보장(福泉寶藏)’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세조는 5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와서 3일간 머물다 갔다고 한다.


복천암은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

 고려 공민왕(재위 : 1351~1374)이 극락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1464년에는 조선 세조가 절에서 신미(). 학조(). 학열()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법주사에서 복천암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깨끗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하고, "만년보력()"이라는 사각옥판(四角玉板)을 내렸다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많은 것이 소실 되었으나 곧 중건하였다.

                      

유물로는 부도 2기가 있는데,

복천암 수암화상 부도(보물 제1416호)는 1480년(성종11년) 제작된 신미의 부도로 팔각원당형이며,

복천암 학조등곡대사 부도(보물 제1418호)는 1514년(중종 9)에 제작된 부도이다.


최근

한글 창제설로 새롭게 세인들의 주목받고 있는 신미(信眉1403~1480) 스님이

세조와 3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법주사 찻집에서 대추차와 연꿀빵

 

 

 

 

 

 

 

 

 

 

 

 

 

수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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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봉 거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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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수정교 건너기 전 좌측에 있는 속리산사실기비는 바로 수정봉 거북바위에 관한

사실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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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목욕한 후 피부병이 사라졌다는 목욕소

겨울이라 수량이 적으나 여름에는 제법 멋진 소를 이루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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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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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정(세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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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벽

폭포의 물이 얼어 얼음이 되었다.


 

정조임금도 속리산 복천암 석간수를 알고 있을 정도로 이름난 복천암


 

이뭣고다리

 

이것이 무엇인가? 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뭣고다리 반대편은 시심마(是甚摩)라고 쓰여있다.


시심마(是甚摩): 선가(禪家)에서 참나(眞我)를 찾기 위하여 드는 화두(話頭)의 한 가지

“내가 항상 들고 있는 화두가 문견각지(聞見覺知) 시심마(是甚摩)라. 보고 듣고 깨치고 아는 놈

. 이놈이 뭐꼬? 이뭣고? -화엄선사(華嚴禪師)


참선 시작할 때 스님이 죽비로 탁 한번 치면서 하시는 말씀이죠, 이 뭣고 !

그리고 참선 끝에 가장 마지막 하시는 말씀도 이 말씀이예요, 이 뭣고! 


복천암(福泉庵)

고려 시대에는 공민왕이 자주 머물다 갔고,

 조선 시대에는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복천보장(福泉寶藏)’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세조는 5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와서 3일간 머물다 갔다고 한다.



 

 

 

 

복천암 오르는 길

 ▼ 

이 뭣고 다리를 건너 조금 비탈길을 오르면 우측에 복천암 가는 길이 보인다.

복천암 가는 갈 한켠에는 고목 세 그루가 서 있다.

마치 사천왕처럼

 

 

복천암(福泉庵)

 

 

 

 


 

 

 

 

호서제일선원

복천암 선원은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방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곳이다.

 

동산 스님, 성철 스님, 고암 스님 등

내노라하는 선승들이 모두 몇 철씩 머물다 갈 정도로 선수행으로 이름난 암자다.

성철 스님 행장기를 보면 1943년에 이곳에서 하안거를 난 것으로 돼 있다. 1

936년에 출가했으니 출가한 지 7년째 되던 해에 이곳에 온 것이다.


 

 ▲

복천암의 유래

"신중동국지여지승람(輿) " 보은현 "불우조(佛宇條)"에 따르면

복천사 동쪽에 샘이 있는데 돌 틈사이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재위에 쓸 물을 많이 제공하므로

복천(福泉)이라고 하였다.


 

복천 수각


 

대웅보전과 복천 중간의 암벽

 

 

대웅보전과 산신각

대웅보전 앞 마당은 손바닥만하여 정면으로 사진을 담을 수 없다.

 

 

대웅보전과 산신각의 후면에 자리잡은 나한전

 

 


  ▲

보물 제141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조선전기(1480년) - 높이 3.02m

조선 전기의 고승 신미(信眉, 1403~1480)의 부도로,

최근에

한글 창제설로 새롭게 세인의 주목을 받는 신미(信眉1403~1480) 스님

 

 

 

     
보물 제141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조선 전기(1514년) - 높이 2.96m.

 복천암에 세워진 조선 전기의 승려 학조화상의 승탑(부도).


  

복천암 전경

 

 

 

 

최근

이곳에서 세조와 3일 간 치성을 드린 신미스님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돈다.


일반적으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천(天)?지(地)?인(人)과 혀와 목구명의 모양을 참작하여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한글은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밀명을 받고 3개의 절을 옮겨 다니며 범어를 참고해 창제했다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해 국어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염산김씨(永山金氏)인 신미(信眉) 대사(1403-1480)는

충북 영동 출생의 집현전 학사로 조선에서 유일하게 범어에 능통하여 세종대왕의 밀명을 받고

복천암, 홍천사, 대자암 등에서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어학계에서는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한 것을 정설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 어디에도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2009년 3월 13일 문장대

오늘이 2019년 2월 9일이니 딱 10년만에 다시 찾은 속리산 복천암인데 복천암까지 왔으니

 마음 먹으면 다시 문장대에 설 수 있으나

일정상 문장대는 올라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