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어필현판(御筆懸板)
언제 : 2016.05.03 ~ 05.22
어디 : 국립고궁박물관
현판은 글씨를 나무판에 새겨 건물 등의 문 위나 벽에 걸어 놓은 것을 말하며
여러 종류의 현판 중에서도 건물의 이름을 새긴 것은 편액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궁궐 건물의 현판 글씨는 신하들이 쓰기도 하고
국왕이 직접 쓰기도 했다.
국왕의 친필인 어필로 만든 현판에는 작은 글씨로 '御
어필 현판은 통치자로서 국왕의 권력과 존재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기능도 했다.
현존하는 어필 현판 중에는 조선의 국왕들이 지니고 있었던 뛰어난 서예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도 상당수 있다.
이번 전시가 국왕의 글씨로 만들어진 어필 현판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인식하는 동시에
통치자라는 통상적 이미지에 가려져 있었던 조선 국왕들의 예술가적 잠재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궁궐 현판의 종류
궁궐 현판의 전체적인 형태에 따른 종류는 변아라고 하는 테두리의 유무와 그 테두리의 세부 모양에 따라 나누어진다.
상부와 좌우에 부착된 넓은 테두리의 끝이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온 형태,
상하 좌우의 테두리 끝이 서로 만나 꼭 맞게 물려 있는 형태,
좁고 단순한 모양의 테두리가 부착된 다소 평면적인 형태, 그리고 테두리 장식이 없는 판재 형태로 된 것이 있다.
이 중 첫 번째 형태가 가장 격이 높으며 대개 위계가 높은 건물에 사용되었다. 현판 테두리에는 조각 장식과 여러 가지 종류의
화려한 채색 장식이 더해진 경우가 많다.
어필 현판의 경우에는 특별히 여닫이 형태의 문을 설치하기도 하고, 현판을 비단으로 덮어씌우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사롱'이라고 하였다. 사롱은 어필이나 예필(왕세자의 글씨) 현판에만 적용했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는 현판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어필과 예필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간취천심수 현판
창덕궁 후원 영화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선조 어필이다.
당나라 시인 이군옥의 오언시 (원객)을 각각 한 구절씩 새긴 4조의 현판 중 마지막 구절이다. 「궁궐지」에 의하면 영조 대에
영화당에는 선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칠언시〈남린 화원을 지나며〉를 새긴 현판
창덕궁 후원 존덕정에 걸었던 현판으로 선조 어필이다. 당나라 시인 옹도가 지은 칠언시 〈과남린화원(남린 화원을 지나며)〉
의 전문이다. 현판 상부 우측 가장자리에 새겨진 '선묘어필'이라는 글자를 통해 선조 임금 사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육각형 모양의 존덕정은 1644년(인조22)에 세워져 처음에는 그 모습대로 육면정이라 했다가
나중에 이름을 고쳤다. 존덕정에는 선조와 인조의 어필 현판과 헌종 어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
칠언시 〈중점〉을 새긴 현판
창덕궁 후원 청의정에 걸었던 현판으로 선조의 어필이다.
송나라 학자 주희가 지은 칠언시 〈증점〉의 앞부분이다. 현판 상부 우측 가장자리에 '선묘어필' 하부 좌측 끝에
'현 임금의 병오년 겨울에 새로이 새겨 받들어 걸다 [당지병오동증모계봉]'라고 새겨져 있다.
'현 임금'이 어느 왕을 가르키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원래 있던 현판이 낡아 글씨를 그대로 옮겨 새겨
새로운 현판을 재작하여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청의정은 1636년(인조 14)에 새워졌다.
임풍척번 현판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에 걸었던 현판으로 인조(재위 1623~1649년)의 친필 글씨를 새겨 만들었다.
'숲속의 바람이 번잡한 마음을 씻어주네.'라는 뜻이다. '척번'은 세상의 어지럽고 번거로움을 씻어 없애버리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차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현판 자체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궁궐지」에서 글씨의 주인과 현판을 걸었던
장소를 확인할 수 있다.
가애죽림 현판
창덕궁 영화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숙종의 친필이다.
'사랑스러운 것은 대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교월여촉 현판
경희궁 용비루에 걸었던 현판이다. '달빛이 촛불처럼 밝다.'라는 말로 숙종 어필이다.
현판 우측 상부에 '어필'이라고 양각되어 있다.
숙종은 〈용비루〉라는 제목의 시를 짓기도 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경희궁 용비루는 2층 누각 건물이었으며
아래층은 정의헌이라 했다. 이 현판 역시 숙종의 재위(1674~1720년)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이 지은 칠언시를 새긴 현판
영화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시를 새겼다.
시에서 숙종은 영화당에서 본 연못과 주변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시의 끝 부분에 '갑술년(1694년) 봄에 짓다 [새갑술춘제]라고
덧붙여져 있고, 그 뒤에 왕의 글씨를 뜻하는 '신장'과 '신묵'이라는 내용의 인영이 함께 새겨져 있다.
현판 좌우에 문을 단 흔적인 경침이 남아 있어 원래는 임금이 짓고 쓴 시를 새긴 현판을 보호하기 위한 문이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경합 현판
창경궁에 있던 왕세자의 서연(왕세자가 스승의 강의를 듣는 것) 장소에 걸었던 편액으로 영조의 친필이다.
현판 우측에 '어필'이라고 양각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 영조가 창경궁 동쪽에 있던 건물을 효장세자(1719~1728년)의 서연 장소로 정하고 건물 이름을
'장경합'으로 지은 기록이 있다. '장경'은 씩씩하고 공경스럽다는 뜻으로 왕세자의 교육과 관련된 표현이다.
궁의 동쪽 건물을 왕세자의 교육 장소로 정한 것은 궁궐의 동쪽을 원래 왕세자의 공간으로 인삭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세자는 임금의 후계자로,
떠오르기 전의 태양과 같은 존재이므로 동쪽에 거처하고 동궁이라 했다.
건구고궁 현판
영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인 창의궁 양성헌에 걸었던 현판이다.
'임금이 살았던 옛 집'을 의미한다. 다른 어필 현판과는 달리 '어필'이라는 글자를 현판 좌우에 각각 한자씩 나누어 새겼다.
'건구'라는 표현은 「주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세제로 있다가 왕위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각각
잠룡과 비룡에 비유한 것이다.
현판의 뒷면에 '경술년에 걸다[세경술계〕'라는 명문이 있다.
탄생당 현판
영조 임금이 태어난 장소인 창덕궁 보경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영조의 친필이다.
좌측 끝에 '팔십서(80세에 쓰다)'라고 작게 새겨저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영조는 '탄생당 팔십서'라는 글씨를 쓰고 이것으로 현판을 만들어 보경당에 걸 것을 지시하였다.
현판 제작 방식에 대한 신하의 질문에 영조는 양각으로 새기고 글자에 금칠을 하라고 답했다.
또 다른 어필 현판 제작 관련 기록에서 영조는 현판 바탕의 마감 방식과 글자에 입히는 칠의 종류, 글자를 새기는 방식,
테두리를 장식하는 안료와 무늬의 종류까지 구체적으로 정해 주고 있다.
득중정 편액
화성행궁안에 있던 득중정 편액으로 정조 어필이다.
현판 우측 상단 가장자리에 '어필'이라고 음각하였다. '득중정'은 1790년 정조 임금이 화성에 머물며 활쏘기를 했을 때
연달아 쏜 화살 4발이 모두 명중한 일을 기념하여 지은 이름이다.
이 이름은 「예기」권46 「사의」에 '활을 쏘아 맞히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히지 못하면 제후가 될 수 없다.'라는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온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성능행도〉 병풍의 제6폭에 정조임금이
득중정에서 실시한 활쏘기 행사를 묘사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현사궁 편액
순조 어필로 현사궁은 순조 임금(재위 1800~1834)의 생모인 수빈 박씨(1770~1822)의 상례 기간 동안 신주를 모시고
의례를 올렸던 건물의 이름이다. 이러한 용도의 건물을 혼전 혹은 혼궁이라 하였는데,
대개 기존 건물을 임시로 사용하면서 이름은 별도로 지어 올렸다. 수빈 박씨의 혼궁인 현사궁은 창경궁 도총부 안에 있었다.
현판 우측 상단 가장자리에 '어필'이라 새기고 좌측 끝부부엔 '계미이월일(계미년 2월)'이라고 새겼다.
현판에 새겨진 글자 표면에 금박을 입혔다.
연화막 현판
헌종(재위 1834~1849)의 친필 글씨를 새겨 만든 현판이다.
'연화막'은 장군의 위장군 왕검의 막부를 연화지 또는 홍련막으로 예찬했던 데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훌륭한 막료를 가르키기도 한다.
서화 감상을 즐겼던 헌종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아주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 현판의 글씨도 추사체의 특징을 보여준다. 현판 좌측에 새겨진 '원현'이라는 인문은 헌종의 호이다.
현판을 걸었던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염자보민 현판
철종(재위 1849~1863년)의 친필 금박을 새겨 만든 현판이다.
'염자보민'은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 예민정치를 마음에 새기는 임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현판 좌측 끝에 새겨진 '대용재'라는 인문은 철종의 호이다. 글자 위에 입힌 금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현판을 걸었던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곤령합 편액
고종(재위 1863~1907년)의 친필 글씨로 경복궁 내 건청궁 곤령합에 걸었던 현판이다.
현판 우측 상단에 '어필'이라 새기고 '주연지보' 등 고종의 인장 인영을 함께 새겼다.
'주연'은 고종의 호이다. 건청궁은 1873년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고종이 국가 재정이 아닌 왕실의 돈(내탕금)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침전인 곤령합 등이 있다. 1895년 곤령합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했다. 이후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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