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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국보 및 보물)

국보 제86호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국립중앙박물관 경천사 십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서면 넓은 홀의 맨 끝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탑을 볼 수 있다.
늘씬하게 솟아 올라간 몸매와 독특한 생김새, 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등 늘 볼 때마다 그 우아한 멋에 감탄하게 된다.

 

 항상 볼 수 있는 경천사 십층석탑이라 한번 올려다 보고 지나갔는데,

우연히

경천사 십층석탑에 숨은 이야기를 듣고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진을 담아 본다.


이 탑이 세워진 것은 1348년 고려 때이다.
생김새도 특이하지만 '병을 치유해주는 약황탑'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팔작지붕의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마을을 이룬 듯 보이는 걸작이다.

이 수려한 이 탑을 지키려고

맨 몸으로 총칼에 덤빈 군수와 군민들, 이 척박한 나라를 사랑했던 푸른 눈의 외국인들을 기억할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셀과 헐버트의 유해는 유언대로 고국에 가지 않고,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묻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 - 국보 86호

이 탑은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운 십층석탑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고려 석탑의 전통적인 양식과 이국적인 형태가

조화를 이루며, 고려인이 생각한 불교 세계가 입체적으로 표현된 석탑이다.

 

사면이 튀어나온 기단부에는 사자, 서유기 장면, 나한 등을 조각했다. 목조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탑신부에는

1층부터 4층까지 부처와 보살의 법회 장면을 총 16면에 조각하였으며, 지붕에는 각각의 장면을 알려주는 현판이 달려 있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다섯 분 혹은 세 분의 부처를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지붕만을 복원하였다.

 

 

 

1층부터 4층까지 보살의 법회 장면을 담는다. - 전면

 

 

측면

 

 

후면

 

 

측면

 

 

 

이 탑은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밀반출하였으나, 영국 언론인 E.베델과 미국 언론인 H. 헐버트 등의 노력에

의해 1918년에 반환되었다.

1960년에 경복궁에 복원되었으나 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해 보존상의 문제점이 드러나 1955년 해체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0년간 보존처리를 진행한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용산 이전 개관에 맞춰

현재의 위치에 이전 · 복원하였다.

 

 

 

하단부

 

 

 

중앙부

 

 

 

상층부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뺏긴 후 2년이 지난 1907년 3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총칼을 들고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절터로 몰려왔다.
이 당시에는 사찰의 건물은 다 사라지고 특이한 형태의 대리석 석탑 하나만 우뚝 서있었다.
13.5m의 큰 키에 탑신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화초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석탑을 마구 해체하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근 주민들과 군수 일행이 가로막자 '고종 황제가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내세워 총검으로 위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달구지 수십대에 석탑 조각들을 싣고 개성역으로 빼돌린 뒤 일본으로 실어갔다.

다나카 미쓰아키는 일본의 궁내대신으로 문화재 약탈자 가운데 최고 악질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904년에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본 경천사십층석탑에 흠뻑 빠졌다.
높은 탑이지만 위압감보다는 상승과 안정의 느낌을 주면서 균형감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회색 대리석 탑이었다.
그는 자나깨나 이 탑을 자기 집 정원에 갖다 놓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1907년 1월 24일에 열린 대한제국 황태자(순종)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어갈 방법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러다 뒷돈을 주고 무뢰배들을 고용해 명령을 내렸다.
"고종황제가 결혼식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에 있는 우리 집 정원으로 가져와라"
그래서 이같은 문화재 약탈과 야반도주라는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부소산 기슭에 있는 경천사 터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

 일본인 세기노 다다시가 쓴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실린 사진이다

 

 

황제의 이름을 팔아 문화재를 훔쳐간 이 사기행각은 순식간에 한양으로 전해져,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젊은 영국인의 귀에 들어갔다. 바로 35세의 언론인 어네스트 베셀이다.

베셀은 영국 특파원으로 조선에 왔다가

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돕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라는 일간지 2개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는 통감부의 매수와 회유를 뿌리치고 이 전대미문의 문화재 약탈 소식을 신문에 실었다.

1907년 3월 12자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년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민들은 맨 손으로 우리 유물들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 사정을 알고 있는 중앙 조정은 남의 일처럼 바라봤으니 정말 참담한 일이었다.

다나카가 잠시 조선에 왔을 때 심상훈 궁내대신에게 이 탑이 탐난다고 말하자,

조선의 대신이라는 인물이 "탐이 나거든 가지고 가시지요"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베셀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자, 통감부가 지원하는 <서울프레스>와 일본 정부의 대변지인 <저팬 메일>은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해 일대 논전이 벌어진다.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 소식을 접하자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하기 위해 워싱톤에 다녀오기도 했고,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도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헐버트는 일본 고베의 영자신문 <저팬 크로니클>과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인 <뉴욕 포스트>에 이 사실을 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내외의 여론이 들끓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석탑 약탈을 없는 사실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나서 다나카를 질타하고 조선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다나카는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다"라고 요구했다.
데라우치가 양심적인 인물이라 그런 게 아니고 곧 조선을 병탄해야 하는데 반일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초대 총독으로 올라서는

데라우치는 조선의 유물 반출을 엄금했는데, 이는 조선이 억년만년 일본 땅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도 조선을 떠날 때 석굴암 본존불을 반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다나카는 귀를 막고 11년동안 버텼다.
1918년 결국 국내외 여론의 단합과 계속되는 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무릎을 꿇고 탑을 경성으로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경천사십층석탑은 현해탄을 건너 고국에 돌아왔지만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경복궁 뜰에 서있는 경천사십층석탑

1995년까지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져 있었다.


 

애써 찾아오고도 해방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결국 세월이 흐른 뒤 1959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현재의 경복궁 관리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3년 후에는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복구기술이 낙후해서 조잡스럽게 복원되었다.
일부 훼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칠하고,야외에 세워놓으니 산성비나 풍화작용에 의해 계속 망가져갔다.
결국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석탑을 해체한 뒤 10년간 보존.복원작업을 벌였다.

 

 

 

지난 5월 말부터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으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오늘까지(7/8) 3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발병된 병원을 알리지 않고 감추는 등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대처 미숙이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무고한 국민 304명(실종 9명 포함)이 목숨을 잃은 것도 정부의 초동대처가 미숙했고,

사건을 은폐 축소하는 등

딱 1년 뒤 메르스 사태 역시 세월호 사건과 다를 것 없이 정부의 대처 미숙이었다.

 

국민의 정신적 피로도는 극에 달했고

그동안

 다른 나라에 비해 볼거리가 부족함에도 우리나라를 찾던 외국 관광객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걸음을 돌려 버렸다.

 

다행히

 신규환자가 더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동안 정부가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감췄던 기억이 있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제(7/7) 모처럼 창덕궁을 돌아 인사동을 찾았는데,

그 많던 외국인 관광객이 예전에 비해 거의 보이지 않고 내국인만 북적거려 아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