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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프랑스 -32) 알비 주교 시(Episcopal City of Albi; 2010)

세계문화유산(260)/ 프랑스

알비 주교 시(Episcopal City of Albi; 2010)

 

 

프랑스 남서부를 지나는 타른(Tarn) 강변에 있는 옛 도시 알비는

중세적 건축과 도시 앙상블의 절정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르 퐁-비유(Le Pont-Vieux; 오래된 다리라는 뜻)와

생-살비(Saint-Salvi) 마을과 상가 그리고 10~11세기에 지어진 그곳의 교회가

당시의 발전상을 증언해주고 있다.

13세기에 이르러, 십자군이 카타리파(Cathari)를 상대로 원정에 나서게 되면서 이후 도시 알비는

로마 가톨릭의 강력한 주교 도시(cite episcopale)로서 위상을 갖게 된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붉은 색과 오렌지색이 어우러진 벽돌들로 지어진 대성당은 독특한 남프랑스 식

고딕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마을을 압도하는, 이 요새화된 대성당은 13세기 당시 로마 교회 성직자들이 되찾은

권력이 어떠했는가를 잘 묘사해주고 있다.

강 위로 우뚝 솟은 넓은 주교관 ‘팔래 드 라 베르비(Palais de la Berbie, 베르비 성)’가 더해짐으로써

대성당은 완성된 구도를 갖게 되는데,

중세 시대에 생겨난 여러 주거 구역들이 대성당 주위를 에워싸며 발달해 있다.

알비의 주교 도시는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기념물들과 주변 주거 구역들이 수세기의 세월에도 큰 변화를

겪지 않고, 일관성과 동질성을 지닌 집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북쪽으로 흐르는 타른 강과 남서쪽으로 뻗은 봉디두(Bondidou) 계곡 사이에 돌출된 지대의 이 땅은

고대 요새 부지였다. 이곳은 청동기시대의 인간 거주지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이곳은 현재의 캐스텔비엘(Castelviel) 구역에 해당된다. 처음에는 켈트 족이 차지했다가

갈로로만(Gallo-Roman) 시대에는 소규모 정착지였다. 이곳은 일찍이 5세기에 주교가 자리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중세 초기에 요새화되었고 강에 배가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강둑을 따라 건물들이 들어섰다.

418년 서고트 족(Visigoths)은 이곳을 침략하여 통치권을 빼앗았고

뒤이어 507년 프랑크 족(Franks)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 시기의 모든 유물은 고고학적 가치가 크다. 생 살비 구역(10세기)과 르 퐁-비유(11세기)에서는

중세 초기의 경제 발전과 도시발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마들렌(Madeleine) 문화 구역은

르 퐁- 비유가 끝나는 부분에서 오른쪽에 있는 강둑에 만들어졌다. 알비는 다습하며 서늘한 세갈라(Segala)

고원 및 르에르그(Rouergue) 지방, 그리고 따뜻하고 건조한 가론(Garonne) 강 유역 저지대가 교류하는 지점에 있어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알비는 아주 일찍부터 개간이 되어 다양한 작물을 생산하는

농업 지역이자 농부들이 와인, 가축, 대마, 나중에는 염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계절별로 사고파는

곳이 되었다. 타른 강은 항해가 가능한 강이라서 알비에서 가론 강까지 배로 갈 수 있다. 이 도시는 주변 촌락에서 제조한 양모와 직물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봉건시대에 알비에서 눈에 띄는 점은

12세기와 13세기에 서열이 더 높은 툴루즈(Toulouse) 백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트렝카벨(Trencave) 자작이 월권하여 이곳을 다스렸다는 점이다. 또 토지 소유권 또한 봉건 군주 이외에 소유권을 가진 다른 사람들 즉 생살비의 주교와 참사회원들과 공유되었다. 도시가 명확하게 구역을 구분한 것은 이런 공간 나누기 관행이 반영된 것이다 툴루즈, 카르카손(Carcassonne), 푸아(Foix) 등의 도시들에서처럼 중심 세력 등 중 하나였던 알비 주민들은 12세기와 13세기의 이런 방식의 도시 개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에 반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 중심의 제도는 귀족과 부르주아 모두의 사회적 요구나 상황과도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12세기에는 반대자들이 조직화 되었는데 이들이 알비주아파(Albigenses) 또는 카라리파(순결파, Cathars)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당국이 곧 이단으로 단정한 종교적 관행과 세계와 인간 조건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을 발전시켜 나갔다.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 1145), 엄률(嚴律) 시토회[Cistercians], 그리고 성 도미니크(Saint Dominic; 1206~1207)의 가르침에 대해 이단과 파문 선언이 번갈아 나왔으며 특히 제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에서는 알비주아파에 대한 심문을 주장하였다(1179). 그 후 반대자들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알비에 두 차례 연속 십자군을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첫 번째 십자군 원정[봉건 군주 위주]은 1208~1209년까지 그리고 두 번째 원정[황제 위주]은 1224~1229년까지였다. 알비 십자군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알비 시(市)는 십자군 원정이라는 군사적인 사건으로부터 물리적 면에서는 영향을 덜 받았다. 십자군 원정은 봉건 영주들이 북부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는 정복 사업으로 급속히 변질되었고 나중에는 황제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알비는 무력에 의해 가톨릭 신앙이 회복된 후 람그도크 지역(Languedoc; 툴루즈, 알비 등의 도시가 속해 있던 지역)이 프랑스 통치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대중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하게 회복한 결과 순결주의[Catharism]에 우호적이던 지역 귀족들은 제거되었고, 성직자들은 정신적・유형적으로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알비는 13세기에 이런 과정을 거친 후 도시 설립자인 주교의 통치를 받는 주교 도시가 되었다. 베르나르 드 콤프레(Bernard de Combret)는 십자군 원정의 마지막 시기에 요새 성과 베르비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베르나르 드 카스타네(Bernard de Castanet)는 진정한 로마 가톨릭 신앙을 지켜줄 요새를 구현할 성당을 짓기로 했다. 그 성당이 바로 거대한 알비 생트 세실 대성당(Sainte-Cecile Cathedral)이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도시가 크게 성장하면서 성벽 외부에 새로운 주거 지구와 종교 기관들을 포함하여 주교 도시에 어울리는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대성당은 대중에 영합하고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크게 만들었다. 이렇게 큰 규모의 건물을 짓는데 건축 재료로 벽돌을 선택한 것은 이 지역 석회석의 품질이 낮고 타른 강과 가론 강 유역이 원래 진흙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 람그도크 지역에 있는 도시들 특히 몽토방(Montauban), 툴루즈, 알비 같은 도시들에는 하나의 공통 언어가 주어졌다. 또한 이 새로운 주교 도시는 플랑드르와 카탈로니아는 물론이고 프랑스 북부 지방으로부터 전해진 매우 다양한 예술적・건축 양식적 영향을 받았다. 백년 전쟁・기근・전염병이 시작되면서 14세기 중반 유럽은 중대한 위기를 맞았으며, 알비와 주변 지역도 이 위기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알비는 풀만 우거진 채 성벽에 갇힌 꼴이 되었는데 이런 상황은 백년 전쟁 등의 일련의 사건들 이후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도시의 수공업과 교역은 장기간 침체되었고 사람들도 흩어졌다.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알비 지역은 당시 의류에 염색을 하던 식물성 염료인 대청(大靑)을 추출하는 산업을 기반으로 경제 회복을 하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지방 귀족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멋진 주택을 신축하고 이 역사의 중심지에 남아 있던 오래된 주거지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앙부아즈(Amboise)의 영주이자 주교였던 루이 1세(Louis I)와 루이 2세(Louis II)는 대성당 완공 작업에 착수하여 제단 칸막이와 내부에 돌 난간을 비롯하여 외부 출입구의 천개(天蓋)와 성가대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역 예술가들과 프랑스・플랑드르・이탈리아에서 온 여러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내부에 있던 벽화와 조소 작품들을 대대적인 복구하였다. 복구할 때 너무 많은 장식을 사용하여 때때로 지나치게 장식적인 후기 고딕 양식을 특징을 보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 주교의 베르비 궁전은 중요한 건축적 변화를 겪었다. 이 궁전의 군사적인 측면들은 부드러워졌고 일부는 르네상스의 영감을 받은 건축물들과 정원으로 교체되었으며 그 결과 살기에 보다 쾌적하고 밝으며 개방적인 궁전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베르비 궁전은 점차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나중에 온 알비의 주교들은 17세기에 대주교의 지위에 올라 여전히 도시와 부속 구조물의 주인 노릇을 계속했다. 그들은 알비의 토지를 관리했으며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이중의 권력을 행사했다. 17세기 말에도 이 역사 도시는 여전히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요새 성당 주위에 몰려있는 중세 요새의 외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종종 ‘붉은 도시’라고 불리는데 이는 건축에 이용된 빨간 벽돌 때문이다. 18세기에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도시 개발의 편의를 도모하려고 성곽을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도시 외관이 변화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건축 계획 건수가 늘어 특히 도시 동쪽 지역에 새로 주택 단지가 만들어졌고 도로망이 합리적으로 확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두 미디(du Midi) 운하와 가론 강을 이용할 수 있는 남쪽 지역에 새로운 교통요지가 형성되자 이 지역에서 교역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프랑스 혁명 후 알비 지역도 성직자들의 재산이 매각되었고 건축물들은 관청이나 창고가 되었다. 공포 정치 하의 무질서로 인한 파괴가 있었음에도 제단 칸막이와 성가대석은 다른 유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소 작품들과 성유물 함은 그렇지 못했다. 19세기에 특히 19세기 후반에 도시 재생 프로젝트가 재개되고 확대되었다. 르 퐁-비유가 넓혀졌고 타른 강의 뱃길이 개선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경제가 되살아났는데 이는 카르모(Carmaux) 인근의 석탄 채굴 산업과 더불어 유리 제조 산업과 모자 제조 산업 덕택이었다. 19세기 말에 비올레 르 뒤크의 정신에 따라 건축가 세자 댈리(Cesar Daly) 감독 하에 대성당에 대한 대규모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성당 주변 지역은 성당의 외관을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철거되었고 구 도시 도로도 재정비하였다. 성당 주변에 많은 주택단지가 생겨났으며 도시 주변에서는 광범위한 도시 기반 시설 사업이 수행되었고 구(舊) 주택 단지에는 주로 벽돌로 만들어진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크고 화려했던 베르비 궁전은 점차 방치되었다. 20세기 초에 이 궁전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 기증한 작품들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남은 주민들도 시 외곽의 새 건물로 이사했다. 이 지역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고 모더니즘 양식으로 전면 재건축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이 도시는 상당한 가치를 지닌 도시 유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968년 시 당국이 보존 구역으로 선언하였고 그 결과 1974년 보존 계획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사업 속도가 빨라져 옛 주교 시는 수준의 높은 보존 상태로 그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