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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아일랜드 -1) 보인 굴곡부(屈曲部)의 고고학 유적

보인 굴곡부(屈曲部)의 고고학 유적

(Archaeological Ensemble of the Bend of the Boyne; 1993)

 

아일랜드의 미스 주(County Meath)에 위치한 뉴그레인지(Newgrange), 노스(Knowth), 다우스(Dowth)는

보인 굴곡부(屈曲部)에서 발견된 주요 선사시대 유적지로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50㎞ 떨어진 보인 강의 북쪽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선사시대 거석 예술의 집결지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인 이곳의 유물들은 사회적・경제적・종교적 그

리고 장례적 기능을 가진 것이다.

 

보인 굴곡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신석기시대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인류 정주지의 증거이다. 다양한 기념물 가운데

대표할 만한 것은 거대한 널길무덤[passage graves]으로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적・사회적・예술적・과학적 발전을

보여 준다. 부르 나 보인(Brugh na Boinne; 보인 굴곡부의 아일랜드식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거석묘는

지속적인 정주 생활의 증거이며, 이와 같은 형태는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상과 신앙의 구현체로 살아남은 널길무덤군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적으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면적이 약 780㏊에 이르는 보인 굴곡부의 세계유산은 보인 강의 남쪽과 동・서쪽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름을 따왔다. 북쪽 경계의 일부는 매톡(Mattock) 강으로 이어진다. 

 

보인 굴곡부의 유적 다우스, 노스, 뉴그레인지

원래 강 위쪽에 동서로 뻗어 있는 3개의 낮은 언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3개의 거대한 고분군은 언덕 전체에 퍼져

있으며, 약 40개의 널길무덤으로 둘러싸여 거대한 선사 고분 경관을 이룬다.

이 유적의 대단한 의식적 중요성은 이후 원사(原史) 시대와 기독교 시대의 무덤 양식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끼쳤다.

보인 강이 정치・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인 켈트 해와 아일랜드의 심장부에 모두 연결된다는 점에서

유적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현재 이 지역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다. 

보인 굴곡부의 고고 유적은 100년 넘게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의 심도 있는 탐험 대상이었고, 발굴 작업을 통해

수많은 유적을 찾아냈다. 노스 유적군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가장 최근의 것은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공식 목록에는 30개의 기념물과 유적이 있는데 그 중에는 선돌, 울타리, 거주 유적, 경작 체계[field system]가

포함되어 있다. 뉴그레인지 유적군은 전부 선사시대의 것이며 널길무덤, 원형 요새, 커서스(cursus; 신석기시대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기념비), 헨지(henge) 등이다. 

다우스 유적군은 뉴그레인저와 비슷하지만 교회와 성의 형태에서 중세의 흔적이 엿보인다.

프루드푸트스타운(Proudfootstown)의 성 역시 이 지역 안에 있다. 유적의 터에서 선사(기원전 3800~2200)와 중세라는

두 역사시대를 확인할 수 있고, 중부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뉴그레인지와 노스에서 실시된 대대적인 고분군 발굴 작업과 그 밖의 지역에 대한 소규모 조사 결과,

기원전 제4천년기 초반에 이미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더 의미 있는 유물은 서부 신석기시대

말엽의 것이다. 이 가운데는 집과 방어용 울타리와 경작 체계 등이 있으며, 아일랜드에서 고대 숲 지역에서 나무를 베어

내고 농경을 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약 40개의 널길무덤은 고차원적인 사회 조직과 문화의 발달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 기원은 브르타뉴와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에서 찾을 수 있다.

비커(Beaker; 신석기 후기 및 청동기 초기의 유럽인)의 영향이 도래한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원형 주택이

직사각형 주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지역에 청동기시대의 사람이 살았던 자취는 남아 있지 않고,

이후 철기시대 후반이 되어서야 다시 거주가 시작되었다. 노스 유적군은 요새형 거주지로서 수많은 부속 매장물이

거대한 신석기 무덤들에 섞여 있다. 또한 외부에서 들여온 제품들이 발견되어 활발한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 기독교 시대 초기인 8세기 이후 3개의 거대한 원형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 중 노스는 방어 시설이 없는 커다란 거주 지역이 되었는데 직사각형의 주택들과 지하실을 비롯하여 집약적인 농경과

산업, 문학 활동의 증거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12세기에 앵글로-노르만 족이 침입할 때까지 이곳은

노스 왕들의 수도였다. 노르만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에는 수도회 수도사들의 통제를 받으며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보인 굴곡부 지역을 그들의 농장 또는 사유 농장 체제에 편입시켰다.

이들 농장은 오늘날까지 농업 경관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