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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장흥) 천 년 고찰 보림사

- 국보 제44호 삼층석탑과 석등 -

 

언제 : 2022년 10월 30일 금요일

어디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절

 

돌아보면

어렸을 적 국민학생 때 어떤 책에서 전라남도 장흥에 있는 보림사를 알게 되었으니 인연으로 치면

60여 년이 된 아주 오래된 인연이다.

그때부터 언제 보림사를 볼 수 있을까란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온 것이

나이 일흔 살이 넘어 이곳 보림사를 찾는다.

 

보림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선문구산 = 구산선문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나타났던 주요 종파들로,

신라 서라벌에서 떨어진 지방의 산들에 9개가 분포했기 때문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불교는

지배층부터 민초까지 전국민이 신봉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구산선문은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각 군웅이나 신라 조정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승비를 세워주거나

선종 승려가 자기 지역에 머물도록 보호해 주는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도 전국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등 이 시기 구산선문 사찰의 고승비가 많이 남아있다

- 나무위키 참조 -

 

- 구산선문 종찰가지산보림사 일주문 -

아마 새로 지은 일주문인 듯 싶네.

 

 

 

 

 

 

 

 

‘가지산 보림사’란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

. ‘迦(가)’는 범어의 ‘kya’로 범어 ‘sakyamuni(釋迦牟尼, 석가모니)’에서 ‘가’를,

‘智(지)’는 범어 ‘jnana’로 번뇌를 끊는지혜(智慧)에서 따 왔다. 가지산(迦智山)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머무르는

지혜의 산이란 의미이다.

보림사(寶林寺)는 보배로 이루어진 숲 속의 절로 육조 혜능대사가 지은 중국의 보림사 명칭과 같다.

혜능의 선맥(禪脈)을 이은 한국의 혜능, 보조체징선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보림사라 하였을 것이다.

이 편액 끝에는 효종 8년(1657)에 국가 수호사찰의 제액을 내렸고

영조 2년(1726)에 시행한다는 내용이 함께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창방에는 ‘외호문(外護門)’이란 작은 편액이 걸려 있어

국가 수호사찰이었음을 알려 준다.
- 출처 불교신문 -

 

- 사천왕문 -

 

 

 

-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

보림사는

한국 전쟁 이전에는 49채의 전각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대찰이었으며,

네 권역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 진입공간, 석탑과 석등이 있는 대적광전 공간, 2층 대웅보전과 명부전,

탑비와 부도가 있는 공간, 그리고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 공간이다.

 

보림사는 일주문에서 대적광전까지 평지에 자리하고 있어 산비탈을 이용해 지은 다른 절과는 다르다.

지리산 실상사를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으로,

산아래 전각들과 너무 차이가 나는 너른 공간은 마당이 아니라 운동장이다.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대찰 보림사 전각들과 요사채들이 모두 불타 버렸기에

 아직도 보림사는 공허한 공간이 많아 아쉬움이 있었다. 

 

 

 

보림사는

보림사는 원래 가지사(迦智寺)로 원표대덕(元表大德)이 거처하던 곳이다.

대덕이 법력으로 정사를 도와 신라 경덕왕은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우게 하였다.

이후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헌안왕 4년(860)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을 일으켜 선풍을 크게 떨쳤다.

선사 사후(死後) 헌강왕이 사액(賜額)을 내려 보림사라 하였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 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5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 성보박물관 -

 

- 대웅보전 -

 

 

- 대적광전 -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삼층석탑과 석등

석탑 2기와 그 사이에 있는 석등 한 기로 구성된다.

탑의 높이는 남탑이 5.4 m, 북탑이 5.9m이고, 석등은 8각 형태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 양식으로

탑의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가치가 높다. 1932년 도굴꾼이 사리장치를 훔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쓰러진 탑신을 복구하던 중 탑신부 사리장치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를 발견했는데,

탑을 조성한 때가 신라 경문왕 10년(870)이란 내용이 있었다.

본래 석등은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여 빛으로서 그 뜻을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화엄사, 부석사를 비롯한 고찰들은 석등 하나를 정전의 정면에 비치하여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의 기능을 하였다. 하지만 후대에는 의미가 퇴색되어 조명기구로 전락했기 때문에 정전에 모신 불상의 시선을 피하여

정전의 좌우에 하나씩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등답게 본래 의미대로 석등 하나가 정전 중앙에 배치되었는데,

탑과 함께 온전한 세트로 보존되어 가치가 높다.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었다.

 

-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높이 2.51m 철조 비로자나 부처님(국보)의 왼쪽 팔뚝 뒷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명문에는

정왕 즉위 3년(859)에 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착의(通肩着衣)에 신체는 큰 편이나 몸에 비해 머리가 약간 큰 편이다.

머리에 촘촘히 솟아 있는 나발은 후대에 진흙으로 보수한 모습이다. 양 눈썹은 콧등으로 이어지지만 콧날은 평평하고,

두툼한 입술에 인중은 선명하게 처리되었다.

수인(手印)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모습이다.

 

- 대웅보전 -

대웅보전

보림사에서 유일하게 2층 건물로,

구례 화엄사 각황전, 금산 미륵사 미륵전,  속리산 법주산 팔상전 등이 거대한 2층 건축물인데

큰 산도 아닌 가지산 보림사 대웅보전 역시 6.25 이전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국보 건축물이었다는 데

빨치산이 도주하며 불 질러 웅장하고 거대한 대웅보전이 불타고

최근에 복원하였다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 범종각 -

 

 

 

 

 

- 조사전 -

 

 

 

보조선사창성탑비(884년)에

“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곧 도의대사(道儀大師)를 제1조로, 염거선사(廉居禪師)를 제2조로 삼고,

우리 스님(普照體澄)을 제3조로 한다”라고 하여 보림사가 선종의 으뜸임을 밝혔다.

 

 

 

 

- 보조선사탑에서 바라본 보림사 -

보림사는 천불을 모실 수 있는 평지가람에

일주문에서 사천문, 석탑, 대적광전이 일직선의 축을 이루고 비로자나불을 모셔서

한국 선종의 적손(嫡孫)임을 자랑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 수령 300년이 넘는 무수한 비자림 사이로 자라난

차나무는 선(禪)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신라의 김언경(金彦卿)은 장흥 보림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지킴에 부족함이 없음이여! 베푸심이 끝이 없어라.”

그토록 오래전 인연으로 알게 된 장흥 가지산 보림사를 둘러보며

큰 산도 아닌 가지산에 보림사의 위세가 통일신라 말기에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보조선사 체징을 헌안왕이 보림사에 머룰게한 이유가 있었단다.

헌안왕은 장보고의 사위로 그 시절 장보고는 완도 청해진에 머물며 위세는 왕을 능가하였단다.

서라벌 헌안왕은 당연히 장보고를 견제하게 되었고,

명성 높은 체징을 보림사에 머물게 하며, 그 시절엔  절에도 자체 절을 수호하는 무력집단을 가질 수 있었기에

보림사는 정치적 영향을 받아 대찰을 이룰 수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