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201)/ 터키
트로이의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Troy; 1998)
4,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트로이(Troy)는
터키의 차낙칼레 주[Province of Canakkale]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유적지의 최초 발굴은 1870년 유명한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에 의해 이루어졌다. 과학적 측면에서 이 광대한 유적은 아나톨리아(Anatolia)가 지중해 국가들과 최초로 접촉한 가장 중요한 사례들을 보여 주고 있다. 더욱이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Iliad)>에 기록된 기원전 13세기 또는 기원전 12세기에 그리스에서 온 스파르타・아테네 전사들의 트로이 포위 작전은 이후 세계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창의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이의 고고 유적지는 초기 유럽 문명 발달사 중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단계이다. 이 유적은 유럽 문명 발달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더욱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2,000년 이상 예술 창작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때문에 이곳은 이례적인 문화적 중요성이 있다. 트로이는 에게 해의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동양적 도시의 독특한 사례로서 중요하다. 또한 트로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 유적지이며, 현대 고고학의 출발 지점으로서 공적으로 인정받은 유적이다. 트로이 Ⅱ와 트로이 Ⅵ 구역은 특히 고대 도시의 독특한 사례들이다. 이 도시는 궁을 둘러싸고 거대하게 요새화된 성채와 같다. 행정 건물을 중심에 두고 광범위한 로어 타운(lower town)이 둘러싸고 있으며 요새화되어 있다. 트로이는 보편성을 가진 중요한 문학작품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The Aeneid)>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장소이다. 이곳의 헬레니즘 양식의 분묘들은 아킬레스(Achilles)・아약(Ajax)・헥토르(Hector)・파트로클로스(Patroclus) 등의 영웅이 묻혔다고 추측되는 곳 위에 건설되었다. 트로이[일리온]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 초, 기원전 4000년대 후반부터이다. 성채 주변에 처음 방어벽이 설치된 시기는 기원전 3000년 무렵이다. 이곳의 방어벽은 2번 확장했으며, 1시기 말[Phase I] 기원전 2500년 무렵에는 지름이 110m나 되었다. 초기 청동기시대 끝 무렵인 다음 5세기[트로이 ⅡⅤ]에 정착 계획이 세워지고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2000년 무렵 극적인 문화 변동으로 인해 가옥과 성벽이 돌로 다시 건축되었다. 도시는 처음 성벽을 두르고 정착했던 때보다 상당이 확장되었다. 그 후 트로이 Ⅵ이 확장되어 에게 해 지역 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다른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물품들이 수입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은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350년 지진으로 트로이 Ⅵ이 파괴되어 묻혀버렸다. 방어벽과 가옥들이 붕괴되었지만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좀 더 질서 있는 배치를 갖게 되었다. 기원전 1250년 무렵 트로이 Ⅶ에 종말을 가져온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화재와 학살의 증거는 트로이 전쟁 동안 그리스에게 포위당한 이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역사적 사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실제 원인은 트로이와 미케네 왕국이 서로 상업적 이해 관계가 대립함으로써 높아진 긴장 때문이었다. 미케네는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을 요령껏 통제하면서 흑해 지역에서 수익성 높은 무역을 하고 있었다. 트로이 도시는 다시 한 번 재건되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트로이는 상업적 주도권을 거의 상실했고 기원전 2000년 말기에 버려졌다. 이 지역은 기원전 8세기[트로이 Ⅷ]에 렘노스에서 온 그리스 주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다시 거주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06년 트로이는 트로아드(Troad)에 있는 도시 연맹의 수도가 되었고 기원전 188년 호메로스의 일리온(Ilion; 트로이)으로서 로마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일리온은 로마의 모(母)도시로 인정받으면서 ‘새로운 일리온’이라는 뜻의 일리움 노붐(Ilium Novum)이라고 불렸으며 세금을 면제받았다. 기원전 85년 미트라 해전 때에는 약탈당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방문한 기원전 20년 무렵이 될 때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267년 헤룰리(Herulian)의 침입에 의해 완전히 황폐화되었음에도 도시는 로마의 통치 하에 번성했으며 6세기 심각한 지진에서도 살아남았다. 9세기에 또 한 번 버려졌으나 비잔틴 시기 후반에 다시 주민들이 살기 시작했고 오스만 시기가 오기까지는 다시는 버려지지 않았다. 이 유적지의 당시 역사와 그 이후의 탐사와 보존은 이곳이 발견된 1793년에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이곳을 1810년에 처음으로 일리온으로 확인하였고, 1820년에 트로이라고 확인하였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1868년에 처음 이곳을 방문하여 1890년 죽을 때까지 7가지 중요한 활동을 펼쳤다. 슐리만의 활동은 조수였던 빌헬름 되르프펠트(Wilhelm Dorpfeld)가 이어받아 1893~1894년 동안 완성하였다. 1873년 슐리만은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King Priam’s Treasure]’이라고 잘못 알려진 유명한 금 저장소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은 트로이 Ⅱ에서 유래된 것으로 트로이 ⅧA의 것은 아니다. 1세기가 넘게 진행된 발굴로 23개 구역에서 성채를 둘러싼 방어벽, 11개의 문, 돌로 포장된 경사로 5개의 방어용 보루가 드러났다. 이러한 것들은 트로이 Ⅱ와 트로이 Ⅵ에서 유래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장 초기의 성벽[트로이 Ⅰ] 구역은 처음 방어용으로 건설된 남문 근처에 남아 있는 것이다. 트로이 Ⅱ의 가장 큰 거주 단지는 포치가 있는 5개의 평행하게 긴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megara; 메가라]. 이 건물들 중 가장 큰 것은 그리스 신전의 원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적들은 궁전의 일부 양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 Ⅱ의 수많은 긴 직사각형 모양의 주택 유적은 해당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이다. 이른바 ‘슐리만 참호[Schliemann Trench]’라고 불리는 직사각형 모양의 주택 유적은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발굴자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슐리만의 연구 대상인 ‘프리아모스의 성채’이다. 트로이에 있는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들은 무엇보다 성역 복합 지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도시 배치는 광장의 가장자리에 있는 2개의 주요 공공건물에 반영되어 있다. 오데이온(odeion; 음악당)은 전통적인 말발굽 형태로 설계되어 있으며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좌석 열이 있다. 근방의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 의사당)은 오데이온보다는 좀 더 작지만 설계는 비슷하다. 지평선을 빙 둘러 묘지들과 헬레니즘 양식 무덤 봉분, 그리스와 로마 주거지, 로마와 오스만 시대의 다리들 등과 같은 많은 중요한 선사 유적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펼쳐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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