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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 세조 어진 초본 공개

 

국립고궁박물관 - 세조 어진 초본

 

 


 

언제 : 2018년 10월 29일 월요일

어디 :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궁중서화실


 

 10월 초순 영월 여행에서

단종의 유배길을 여행하기전에

 단종에 대해 역사 공부를 했었는데 단종하면 세조가 어쩔 수 없이 더불어 등장하기에

세조도 함께 공부를 하여 여행기를 쓰면서 도움이 되었다.

 

가을 깊어가는 날.

 

서울 고궁박물관 지하 궁중서화실에서 

 국립고궁박물관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 정치·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을 함께 선보인다.

  

전시기간 : 2018-10-22 ~ 2019-01-13

 

 

 

 

 

 

 

 

 

 

 

 수양대군으로 널리 알려진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는 조선의 제7대 국왕이다.


본인의 형제와 많은 신하를 죽인 정변으로

조카인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왕위를 빼앗아 왕좌에 올랐다.

도덕성과 명분이 결여된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반면,

통치와 업적은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의 기본 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제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 전시는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 정치-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을 함께 선보인다.

또,

세조란 묘호(廟號)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이름〕가 의미하듯,

그의 사후 왕릉과 어진을 모신 진전에서 나라를 재건한 왕으로 숭배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이를 통해 야심차고 비정한 군주로 알려진 세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장릉지(莊陵誌)

조선 1711년 간행, 19세기 후쇄

정조의 명으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신하들의 단을 만들면서 단종과 관련된 사적을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세조의 통치와 업적

세조는 재정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운영의 기본 원직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재를 확립했으며,

직접 쓴 글과 시를 매개로 신하의 뜻을 살피거나 충심을 고취했다.

또, 불경 간행을 저담하는 기구인 간경도감을 설치해 주요 불교 경전에 대한 한글번역본을 발행했다.



열성어필(列聖御筆)

역대 왕들의 글씨 탁본을 모아 놓은 첩에

 실린 세조의 친필로 "효경(孝經)의 응감장(應感章)'을 옮겨 쓴 것이다.

 

 

열성어제(列聖御製)

조선(1755년)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이 지은 시문을 모은 책에 실려 있는 세조의 시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 1485년 이후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나라 전반의 통치 규범을 담고 있다.

세조 즉위 후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1466년에 대강의 내용을 마련했으나 보완과 수정작업을 거쳐

1485년(성종 16)에 완성되었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조선 1461~1462년 이후

중국 송나라 때의 승려 계환이 「능엄경」의 핵심 부분을 풀이한 책에

세조가 직접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한 것이다.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조선 1464년 이후

선종의 핵심 불전인 「선종영가집」을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세조가 친히 한글로 토를 달고 효령대군 등이 번역하여 1464년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월인석보(月印釋譜)

조선 1568년

석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세조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釈譜詳節」을 덧붙여 쉽게 풀이한 것이다.


 





 

 

 

  

 

 

 

 

영조가 광릉 참배 후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

조선 1755년

1755(영조31)영조가 세조의 능인 광릉을 참배하고 난 뒤의 감회를 손수 지어 쓴 글을

현판에 새겨 광릉 재실에 건 것이다.



정조가 광릉 참배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조선 1792년

1792년(정조 16) 정조가 광릉을 참배하고 양주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세조를 칭소하며 지은 글이다.

서정수가 왕명을 받아 쓴 현판으로 광릉의 재실에 걸려 있었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에 대한 평은 좋지 않다.

 

사료는 그에 대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직계제로 고쳤으며,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집현전을 없앴고 경연(經筵)도 열지 않았다.

태종 이후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던 세종이나 성종과는 반대였다.

그러나 그는 태종에 이어

조선의 정치, 군사 등을 정비하고 조선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그가 왕위에 머문 기간은 14년 정도지만

그동안 많은 제도를 개혁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조는 말년이 되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일종의 원상제(院相制)로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1468년 9월 세조가 세자에게 전위(轉位)한다는 뜻을 밝히자 대신들은 불가하다며 나섰다.
“운(運)이 다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다음 날 죽었다.

 

이것은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려 세조는 불교에 큰 관심을 두었다.

 

세조가 불교 융성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 아래에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