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10)/ 일본
히라이즈미(Hiraizumi–Temples,
Gardens and Archaeological Sites Representing the Buddhist Pure Land; 2011)
히라이즈미(平泉) 즉 불교의 정토(淨土)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학적 유적군으로 신성한 긴케이 산(金鶏山)을 포함해서 모두 5개의 유적이 있다.
히라이즈미의 도시는 11〜12세기 일본 열도 북부 영역에 있어서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교토(京都)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이 영역은 8세기 일본에서 유행했던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우주론에 기반을 두었다.
이것은 내세에서 얻는 마음의 평화뿐만 아니라, 사후에 사람들이 열망하는 정토(淨土)를 제시했다.
정토종은 일본의 토착적인 자연 숭배 신앙인 신도(神道)와 융합해서
일본 고유의 설계와 정원 디자인 개념을 발전시켰다. 히라이즈미에는 정토 정원이 4군데 있다.
그 중 세 곳은 신성한 산인 긴케이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정토 사상의 이상과 정원, 물, 주변 경관의 관계에 관한 일본의 토착적 개념과의 융합을 예증(例證)하고 있다.
2곳의 정원은 발굴 조사에 의해 발견된 수많은 상세 사항에 기초하여 복원된 것이고,
나머지 2곳은 지하에 매장된 채로 남아 있다. 짧은 역사로 끝난 히라이즈미의 도시는 11〜12세기에
일본 열도 북부 영역에 있어서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교토와 경쟁했다.
당시의 지배 씨족(氏族)의 북쪽 파벌인 오슈 후지와라(奥州藤原) 일가가 4곳의 정원을 만들었다.
이것은 현세(現世)에 있어서 정토(淨土)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즉 연못, 수목,
긴케이산 정상과 관련하여 불당을 면밀하게 배치함으로써 실체화된 이상향의 광경(光景)으로 조성되었다.
중후하게 금박을 입힌 쥬손지(中尊寺)는 12세기부터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며,
지배 씨족의 막대를 부를 반영하고 있다.
모쓰지(越寺庭園)는 850년에 창건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2세기 중엽 재건을 시작해 불당과 탑이 40채, 승방이 500개의 규모로 쥬손지에 능가하는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거듭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부처가 사는 정토 정원인 '오이즈미카이케'는 1,200년이란 세월을 묵묵히 견디면서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사바 세계에 전하고 있다.
모쓰지
쥬손지(中尊寺)는
천태종의 도호쿠 총본산으로 850년 창건되었으나
12세기 초 오슈후지와라 가문의 1대 후지와라노 기요히라가 전란으로 죽은 희생자들의 영을 정토로 이끌고
이 지방을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염원으로 21년에 걸쳐 재건했다.
14세기 화재로 화려했던 불당과 탑들은 소실되었지만
금빛 찬란한 곤지키도(金色堂)와 3천점에 이르는 국보, 중요 문화재들은 보물관인 산코우조에 전시되어 있다.
1124년 재건된 쥬손지의 불당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콘지키도는
기둥, 벽, 마루, 천장, 문에 이르기까지 온통 금박으로 장식하고 기둥은 야광조개를 이용해 섬세하게
나전칠기 세공까지 한 것을 보면 불당이라기보다는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곳의 수미단에는 오슈후지라와 가문의 1~3대까지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쥬손지
다이린지(大林寺)는 안중근 의사의 위폐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안 의사 옆에 있는 사진은 안 의사가 감옥에 갇혔을 때
일본군 헌병이었던 지바 도시치라는 사람의 부부 사진으로 그는 일본의 정치가를 암살한 안 의사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점차 안 의사의 동양 평화를 갈구하는 굳은 의지와 높은 인품의 소유자임을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사형수와 감옥의 간수, 가톨릭 신자와 불교 신자, 독립군과 일본군이라는 모든 장벽을 넘어
서로 존경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안 의사가 교수형으로 짧은 생애를 마칠 때
안 의사는 도시치 씨에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라고 쓴 필묵을 선물한다.
눈물로 안 의사의 마지막을 배웅한 도시치 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고향 센다이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
평생 안 의사의 위패를 모시며 그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도시치 씨도 세상을 떠나 대림사의 뒷편에 무덤으로 남아있다.
다이린지
켄비케이 계곡
켄비케이 계곡
사하라 유리공예
이 지역은 정치, 행정상의 지위를 상실한 1189년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히라이즈미는 엄청난 번영과 막대한 부를 나타내는 동시에, 극적이면서도 빠른 속도의 몰락을 상징하기도
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
1689년 하이쿠(俳句) 시인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영광의 3세대가 꿈의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夏草や 兵どもが 夢の跡)’라는 의미의 하이쿠를 남겼다.
정토 정원, 현존하는 12세기의 사찰, 신성한 긴케이산과의 관계를 수반하는 사원 불당의 복합체(複合體)는
히라이즈미의 재력을 반영하는 유일한 예이며, 설계와 정원 디자인에 관한 일본인들의 독특한 개념을
나타내 주고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의 사찰이나 정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완전성; 정토 정원과 함께 사찰 복합체의 잔해,
그리고 이것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신성한 긴케이산이 포함된다.
주손지(中尊寺), 모쓰지(毛越寺), 간지자이오인아토(観自在王院跡) 유적이 완벽하게 시각적 유대를
이루고 있는 반면, 무료코인아토(無量光院跡)의 주택과 다른 건물들은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찰과 문화유산 밖의 완충 지역에 있는 긴케이산 지역과는 시각적 관계가 존재한다.
정토 우주론과 관련 있는 공간적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이 같은 관계들의 공간적 완전성이 유지될 필요가 있다.
진정성; 발굴된 유적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두 곳의 정원은 건축과 식물학적 증거에 관한 면밀한 분석을 기초로 하여 복원되었다.
주손지의 금색당(金色堂)은 주목할 만한 유물이며,
재료와 건축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훌륭하게 보존되었다. 경관 안에 있는 사찰의 진정성은
현재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콘크리트 건물 때문에 약간 훼손되었다.
문화유산이 가치를 그대로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4개의 사찰이 불교 정토종이라는
심오한 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고무적인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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