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선포하고 광무개혁 단행한 고종 개혁 의지 밝혔지만
민의수렴 부족 한계
1895년 10월 을미사변과 이듬해 2월 아관파천. 암울한 조선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두 사건이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스스로 지위와 위엄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1897년 10월의 일이다.
조선은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중국과 대등한 자격을 갖춘 황제국 지위에 올라섰다.
고종은 왜 그 시점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을까.
1896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현재 정동에는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사라졌지만, 공사관 전망탑은 현재까지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을 택한 다른 이유는 근처에 경운궁이 있어서 새로운 왕궁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운궁으로의 환궁(還宮)을 염두했던 고종은 경운궁 중축을 지시했다.
기존 석어당과 즉조당 외에 함녕전과 준명당 등이 새로 건축되면서 경운궁은 궁궐의 위상을 갖춰나갔다.
1년간 파천 기간 동안
고종은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해
파견했고, 러시아의 군사와 재정 고문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조선 자주성을 회복하고 ‘민국(民國)’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해나갔다.
러시아공사관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1년 동안 지속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광해군이 잠시 머물렀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궁궐로서 거의 활용되지 않아 궁궐의 격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 감시가 심한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옮기는 것보다
러시아 등 서양 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경운궁은 고종이 새로운 뜻을 펼치기에 유리한 공간이었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구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해 새것을 참작한다)’에 입각해
근대국가 수립에 필요한 기구를 설치했다.
1897년 8월 16일 연호를 광무(光武)로 짓고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알렸다.
10월 12일에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미 건설해놓은 환구단에서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왕과 황제의 위상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왕은 토지와 곡식의 신인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지만, 황제는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고종은 황제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환구단을 둥글게 조성했다.
현재 웨스턴조선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환구단 건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가 남아 있다. ‘고종실록’에는 당시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했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심순택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면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한 것은 삼한의 옛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자는 의미가 있었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조선 이후로 강토가 분리돼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퉈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했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한 것이다.”
고종의 발언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1897년 10월 황제 국가임을 선포한 고종은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이 개혁을 광무 연간에 추진했다고 해서 ‘광무개혁’이라고 부른다. 1899년 8월 17일 고종은 대한제국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 9개 조항을 발표했다.
‘대한국 국제’의 핵심 내용은 육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면권, 조약 체결권 등 주요 권한을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1899년 7월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가 대원수를 겸임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부대인 시위대(侍衛隊)와 지방 진위대(鎭衛隊)를 증강해 배치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고종 황제의 군복 입은 모습은 대원수 복장으로
프러시아식 군복을 착용한 것이다.
고종은 대내외에 황제이자, 군사 통수권자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종래 탁지부에서 관리하던 재정을 황제 직속 궁내부 내장원(內藏院)에서 관리해 황제가 직접 경제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미였다.
경제개혁을 위해 미국인 측량사를 초청해 근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소유 증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했다.
식산흥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상공업 진흥 정책도 광무개혁의 큰 성과였다.
기예학교, 상공학교, 외국어학교 등이 설립되고
황실 스스로 방직, 제지, 유리 공장 등을 설립해 산업 발전의 기반을 조성했다.
철도와 전차, 전화 가설 등 교통과 통신시설의 발전을 추진했으며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참여하는 등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와 긴밀히 교류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1902년에는 국가(國歌)를 만들고, 어기(御旗·태극기)를 제작했다.
대한제국은 강력한 황제 권력을 바탕으로 국방, 경제, 산업, 교육 등 많은 분야에서 독자적인 근대화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일제강점기 식민사관 논리에 의하면 조선왕조는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하고 정체가 됐다고 하는 소위 ‘정체성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자생력을 갖고 충분히 근대산업국가로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황제 권력이 지나치게 강한 상황에서
이뤄진 하향식 개혁이어서, 개화파와 같은 지식인 그룹이나 일반 국민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해
개혁 자체가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하는 의궤(儀軌) 편찬에도 반영됐다.
이제 조선은 엄연히 황제국이 됐다.
의궤 표지에는 황제만이 사용하는 황색 비단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의궤의 표지에는 초록색 비단이 사용됐다.
고종 황제 즉위식을 기록한 ‘대례의궤’의 반차도에 그려진 가마는 모두가 황색으로 표현돼 있다.
황제로의 격상과 함께 왕세자 지위도 황태자로 올라갔고, 황태자에게 올리는 의궤의 표지는 붉은 색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00년에 제작된 ‘의왕영왕책봉의궤(義王英王冊封儀軌)’ 표지를 보면,
규장각에 보관한 의궤의 표지는 황색 비단, 시강원에 보관한 의궤의 표지는 붉은 비단임이 나타난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제작된 의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명성황후의 국장과 관련된 것이다.
고종은 1897년부터 1895년 을미사변으로 희생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황후의 격에 맞게 하고 황후 무덤(홍릉)도 다시 조성하는 작업을 추진했고, 이를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로 남겼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국장도감의궤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데, ‘발인반차도’는 78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장례 기간이 길었을 뿐 아니라 의례를 황후의 격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규장각, 시강원, 비서감, 예식원, 의정부, 정족산, 오대산 등 7곳에 보관했다.
이외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의궤로는 1902년 고종 황제가 51세에 기로소에 입소한 것과 등극 40주년을 기념한 진영 행사를
기록한 ‘(고종임인)진연의궤’와 같은 해에 황제와 황태자의 어진을 직접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 등이 있다.
이들 의궤에는 황제와 황실의 위상을 강화하는 고종의 의지가 잘 기록돼 있다.
최근 서울시는 ‘정동, 그리고 대한제국13’ 프로젝트를 통해,
정동 일대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한제국 역사 현장을 탐방하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 행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뿌리가 되는 대한제국 역사 현장을 찾아 고종 황제의 고뇌와 근대화 의지를 체험해보자는 취지리라.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80호 (2016.10.26~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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