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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일본의 압박 속에 황제 물러난 고종 -43

 

 

일본의 압박 속에 황제 물러난 고종 - 헤이그 밀사 사건후 강제로 순종에 선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국가임을 선포한 고종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호시탐탐 이권을 노리는 지역이었다.

누구보다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낸 나라는 바로 이웃 일본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우위를 확실히 확보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전략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고종은 개혁을 통해 맞섰지만

개혁 추진 세력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한제국 성립 후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서구 열강은 광산, 철도, 산림 등 조선에서 많은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특히 일본은 군대를 파견해 협박하면서 많은 이권을 얻었다.

1898년 경부철도, 1899년 경의철도 부설권을 확보하고 여러 지역의 금광 채굴권을 확보했다.

무역에서도 일본은 대한제국 수출의 80~90%, 수입은 60~70%를 차지하는 구도를 만들어 경제적으로 예속시켜나갔다.

목포, 군산 등 개항장 일대에는 은행을 설치해 금융 자본을 거의 독식했다.

 

일본이 대한제국 경제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된 나라는 러시아였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는 완전히 조선 지배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러시아가 일본에 맞설 수 있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1895년 4월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자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연합해(삼국간섭)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만주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었던 영국과 1902년 영일동맹을 맺었다.

 

영국이 청을, 일본은 대한제국 지배권을 보장받는 협정이었다.

일본의 군사·경제적 침투가 심해지고 경부철도 부설이 장래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북위 39도 이북의 땅을 중립지대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양국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1904년 2월 인천 월미도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또 랴오둥 반도의 뤼순항을 기습 공격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원인이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외중립을 선언했지만, 전쟁의 파고에서 결코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은 예상을 깨고 1905년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1905년 5월 대한해협에서 격침된 것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일본 해군을 지휘했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동양의 넬슨’으로 불리게 됐다.

 

 여기에 1905년 6월 1차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더 이상 러시아는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미국이 중재에 나서서 러시아와 일본의 전권대사를

미국의 포츠머스(Portsmouth)로 불러 양국이 협상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이 15개조 강화조약으로 구성된 포츠머스조약이다(1905년 9월 5일).

 

이 조약은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며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을 일본에 할양하는 등 절대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포츠머스조약 2개월 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받았다.

 

외교적으로 걸림돌이 사라지자 일본은 경제 침략을 본격화했다.

1905년 7월부터 이제까지 통용되던 상평통보 유통을 금지하고 일본 화폐를 사용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성은행(조흥은행) 등 민족 금융기관이 몰락하고 제일은행 등 일본 은행이 금융을 장악했다.

교통과 통신 분야에서도 침략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으며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침략은 정점에 이르른다.

 

일본 공사 하야시는 군대를 이끌고 고종 황제가 거처하는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황제와 대신을 협박하면서 보호조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끝까지 반대했지만 일본은 대신들만이 참여한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도 수상 한규설이 끝까지 반대하자 일본군은 외무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다가 날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제의 서명이 없으므로 당연히 무효였지만 일본은 강압적으로 이 조약을 유효라고 강조했다.

 

1905년 중명전에서 체결된 이 조약을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인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무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부대신 권중현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른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조약으로

일본의 승인 없이 대한제국은 해외 어느 나라와 외교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 위한 전 단계 조치였다.

일본은 이를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다.

통감부는 1906년 2월 설치돼  1910년 8월 주권 상실과 함께 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대한제국 국정을 모두 장악한 통치기구였다.

 

을사늑약 체결은 온 국민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시종무관 민영환과 좌의정 조병세, 전 참판 홍만식, 전라도의 재야 선비이자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선택했다.

 

의병을 조직해 무력으로 일본과 친일파에 저항하는 ‘을사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임병찬 등이 대표적 의병장이었다.

 최익현은 73세의 고령임에도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으며,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에서 봉기해 주로 경상도와 강원도 해안 지역을 무대로 했다.

 

을사오적을 적극적으로 응징한 인물들도 있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오적암살단을 조직했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단검으로 찌르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해외에서도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외교 고문으로 대한제국에 온 후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의 통감정치를 홍보하던 미국인 스티븐스는

재미 동포인 전명운과 장인환에 의해 피살됐다.

 

고종 또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데 적극 나섰다.

대한매일신보에 친서를 발표해 황제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선언했다. 특히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주목했다.

이 회의에 대한제국 사절을 보내 전 세계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했다.

 

이상설은 황제의 신임장을 받들고 이준, 이위종을 부사로 대동해 먼 길을 나섰다.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

헤이그에 도착한 3인방. 사절을 보내는 비용 대부분은 황실의 개인 자금인 내탕금(內帑金)에서 나왔다.

 

그만큼 고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밀사가 파견된 것. 하지만 이들은 회의장 출입도 할 수 없었다.

일본 측 연락을 미리 받은 주최 측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어서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대표단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이준 열사는 울분 속에서 분사(憤死)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졌다.

고종이 황제로 존속하는 한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해

1907년 7월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데 이어 왕마저 바꾸는 만행을 저지를 만큼 일본은 강하면서도 오만했다.

반면 대한제국은 이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고종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본의 압박 속에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고종을 대신해 황태자인

순종이 7월 19일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다.

 

1863년 12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 흥선대원군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44년간 재위했던 고종은

근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난파를 헤쳐가기도 했지만

일본 제국주의 기세는 감당하기 너무나 큰 파고였다.

 

씁쓸하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고종은 자신이 그동안 거처했던 경운궁에 머물렀고,

 황제가 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를 잡았다.

경운궁이라는 명칭은 퇴위한 고종이 덕을 갖추고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1907년 7월 순종 황제의 즉위, 그것은 조선 왕조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82호 (2016.11.08~11.15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