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고양) 사적 제200호 서삼릉(西三陵)

 

사적 제200호 서삼릉(西三陵)

 

 

 

언제 :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어디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1870(고종 7)에는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하였다.

그러나

서삼릉은 공개 지역과 비공개 지역으로 나뉜다.

 

 

서삼릉 가는 길에 대설이 지난 한겨울임에도 어쩌자고 봄의 전령사인

노란 개나리가 피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으나 비공개지역에 있다.

 

1944년에는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서삼릉으로 옮겨왔으나 비공개지역에 있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엔 덕수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 54기의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서삼릉 배치도

공개 지역과 비공개 지역

 

 

공개지역

 

 

비공개 지역

효릉 : 조선 제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의 능

소경원 :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 -1636년 병자호란으로 1637년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다옴

희묘 : ㅈ선 제10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

 

 

 

 

 

 

 

희릉(禧陵)

희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로 중종 원년(1506)에 숙의가 되고 그 이듬해에 왕비가 되었다.

왕후는 중종 10년(1515)에 맏아들인 인종을 낳고, 산후의 병으로 25세에 경복궁에서 돌아가셨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희릉 큰이미지

 

희릉(禧陵)

(문화재청 자료)

 

희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만을 두른 단릉(單陵)으로 단아한 느낌이다. 배치나 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기둥 같은 몸체에 큰 머리를 올려놓았으며 목이 거의 없어 어깨가 약간 굽어보인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나 그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측면의 소매 주름 또한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끝부분에 가서 반전하는 곡선이 재미있다.

 

 

 

조선국 장경왕후 희릉

 

 

 

 

 

 

 

예릉(睿陵)

조선 제25대 철종(哲宗)과 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 1837~1878)의 능이다.

 

철종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의 셋째 아들로 순조(純祖) 31년(1831)에 태어났다. 헌종(憲宗)이 재위 15년 만에

자손이 없이 돌아가시자, 그 이듬해 대왕대비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강화도에 살고 있던

철종을 불러들여, 19세 때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그 뒤로는 외척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고,

재위 14년(1863) 12월에 33세로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철인왕후는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高宗) 15년(1878) 42세로

창경궁에서 돌아가셨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이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다.

전계군의 이복형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때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죽었고,

아버지 은언군은 신유박해(순조 1) 당시에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와 함께 사사되었다.

전계군 본인도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전계군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으며,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철종이다.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당시 이원범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철종은 헌종이 죽은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당시 철종의 나이 19세였지만 친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가 처음부터 철종을 왕위 계승자로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인 이하전(李夏銓)으로 후사를 이을 생각이었다. 항렬상 이하전은 헌종의 조카뻘이었다.

그러나 이하전 주위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 세력이 순원왕후를 설득해 후계자를 바꾸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만한 왕을 앉혀 놓고 풍양 조씨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다.

철종은 학식도 덕망도 부족한 왕이었다. 덕분에 궁정은 안동 김씨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철종은 1851년(철종 2)에 순원왕후의 친척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그가 철인왕후(哲仁王后)다.

 이로써 안동 김씨는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세도정치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철종에게는 이 밖에 7명의 후궁이 있었다.

철인왕후와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철종은 1852년(철종 3)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독자적인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항상 안동 김씨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그들의 뜻에 따라 처리했다. 일설에 의하면 철종이 점차 학식을 쌓고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려고 하자 안동 김씨 세력이 일부러 철종에게 후궁을 계속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철종은 주색에 빠진 채

 점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고, 안동 김씨 세력의 학정은 더욱 극에 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862년(철종 13), 마침내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은 2월 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은 3개월이 지난 후에나 겨우 진정되었으나, 민란은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올라

결국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후사도 잇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이미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조선의 국운도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 갔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예릉(睿陵)이다.

 

 

25대 철종(哲宗) 예릉 큰이미지

예릉(睿陵)

(문화재청 자료)

철종은 재위 14년 6개월 만인 1863년 3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고종은 철종의 능을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며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므로

예릉의 석물과 부속 건축물들은 웅장한 규모로 조영되었다.

 

평소 부덕이 높았던 철종의 비 철인왕후가 1878년(고종 15)에 42세로 승하하면서 이곳에 함께 안장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1908년(융희 2) 7월 30일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로 각각 추존되었다.

25대 철종(哲宗) 예릉 큰이미지

 

 

 

 

 

대한

철종장황제 예릉 -  철인장황후 부좌 

대한제국 1908년(융희 2) 7월 30일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로 각각 추존되어 왕과 왕비가 아니라 황제와 황후이다.

 

 

 

 

 

 

 

 

 

 

 

 

 

 

 

효창원과 의령원

 

 

 

효창원(孝昌園)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다.

세자묘의 예로 조영되어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호와 석양이 봉분 주위에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 한 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문효세자는 1786년(정조 10)에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같은 해 윤7월 19일에 현재의 용산구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 후 1870년(고종 7)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의령원(懿寧園)은 21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첫째 아들 의소세손의 무덤이다.

 세손의 묘로서 장례 절차를 치루어 석물이 간소하다.

표석,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1쌍, 그리고 문석인, 석마, 석호, 석양이 각 2기씩 세워져 있는데,

봉분 옆에 자리한 표석의 전면 큰 글씨와 후면의 음기는 모두 영조의 친필이다.

 

의소세손은 1752년(영조 28) 3월 4일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의소(懿昭)라 하고, 그 해 5월 12일 안현(鞍峴) 남쪽 기슭에 안장하면서 의소묘(懿昭墓)라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의령원은 현재 서울 중앙여고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49년에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서삼릉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삼송역에서 서삼릉행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또한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늘 가슴에 아쉬움으로 남았던 철종의 예릉까지 보았으니, 마음에 남았던 아쉬움을 겨울 찬 바람에 날려 버린다.

 

귀갓길에 본 겨울 북한산의 위용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