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運의 大韓帝國王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토히로쿠니 공작과 조동윤 남작
(1919년2월9일 촬영)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 나서는 고종의 모습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이날 기념 촬영에는 이왕직 관리들과 중추원 인사들,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군인과 경찰 고위 관계자들이 참가하여
그 중 이 사진은 일본 인사들이 중심이 된 사진으로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인물의 면면을 보여준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 하는 영친왕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 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덕혜옹주의 소학교 수업
수업을 받는 모습 이다.
뒤쪽에 학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 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출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유치원을 방문한 영친왕
당시 사진첩 기록을 보면 그는 원아들의 재롱 섞인 유희를 감상했다고 한다. 원아 가운데는 그의 형제
의친왕의 아들인 이 우가 포함되어있었다.
(1918년 1월25일 촬영)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를 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
사진은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 총독부 관계자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차려입은 유족이 그 뒤에 어색하게 선 모습은 쇠락한 황실의 처지가 도드라진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 보 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그 옆에 화려한 견장의 제복을 입은 정무 총감 야마가타의 모습이 보인다. 고유의 왕실의례조차 일본식을 강요당했던 당시
호머 헐버트씨 는 1906년 발간된
'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 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 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아래 사진; 대원군 - 이 하응,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 이하응
인산습의 광경을 사진사가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사진들은 1910년 일제 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 을 담고 있다
영친 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1918년 1월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1층(반지하)에 시종인들의 거실을 두고 2층에 접견실과 홀, 3층에 황제와 황후의 침실, 거실을 두었다. 19세기 고전주의적
양식을 답습하여 총 면적 1,264평으로서 일제 강점기 전 기간중 가장 규모가 큰 순석조 건물로 세워졌다.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 기념으로 선생이 생전에 촬영한 사진작품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이 발견됐다. 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회장은 25일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황실 사진을 공개했다. 1962년 일 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형제, 민영환의 사위)선생의 유품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당시 조선 황실의 사정 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촬영자는 미상. 이 사진들은 31일부터 열리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창립 60주년과 백오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왼쪽부터 영친 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 모습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
이 사진은 1882 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 1926년 4 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 을 토하는 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그 해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6년 2월에 이미 통감을 설치해 국정을 간섭하게 됐으니 조선은 망국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른 시점이었다.
통감 설치 이후 일본인이 정부 각처의 차관으로 임명되고 행정력을 모두 장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한다.
이어 일제는 1908년 경제 수탈을 위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일제가 조선에 빼앗을 것은 국권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거센 폭풍우 몰아치는 들판에서 깜박거리는 등불이었던 조선은, 1910년 8월29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매국노가 앞장선
한일합방 조약이 맺어지며 불이 꺼지고 만다. 대한제국 멸망 후 순종(1874~1926)은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퇴위 당하고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 돼 창덕궁에 갇혀 한 많은 세월을 보낸다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그 이전인 1898년 커피를 즐기던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커피에 독을 넣었다는 일제 독살설도 있다.
커피 맛을 잘 아는 고종은 한 모금 마시다가 뱉어버렸지만
1926년 4월25일 승하한 순종은 27일 소렴을 하고 29일 대렴을 마친 뒤 , 빈전(殯殿·발인 전까지 관을 두는 곳)을
창덕궁 선정전에 설치한다. 경기도 남 양주시 금곡동
고종의 홍릉 경역 왼쪽 줄기에 능을 정하고 5월7일부터 산역을 시작했다.
순종은 즉위하자 순명효황후로 추상하고 민씨의 유강원(裕康園)을 유릉(裕陵)으로 추봉했다.
일제로서도 이미 능호를 받은 유릉을 격하시킬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일. 더욱이 황실에서 무덤을 천장하고
부부를 합장시키겠다는 데야 제 아무리 일제라도 간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일제가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조선의 황제가 죽은 분노를 터트릴 민중들의 움직임이었다
순명효황후가 죽은 지 21년 후인 1926년 6월 4일 오전 6시, 황후의 유해는 구릉(舊陵)에서 발인해 금곡으로 향한다.
6월5일 오전 6시 황후는 오른쪽 황제의 자리를 비워두고 왼쪽에 자리 잡는다.
닷새 후인 6월10일 장례식을 마친 융희황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의 대표자 박용규, 곽대형, 이광호, 이선호 등이 주도해 사립고보생 2만4000명을 동원했고,
연희 전문의 이병립, 경성대학의 이천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박하균, 박두종, 이병호 등이
이는 학생들이 주도해 전국으로 퍼 져나간 6·10 만세운동의시작이었다.
일제가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시켰지만 순종은 조선 민중에게 여전히 황제였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조선총독부는
미리 경찰과 군인 7천명을 동원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독립의 염원을 외치는 조선의 함성을 막을 수 없었다
뒤이어 을지로, 종로3가, 동대문, 청량리에서 학생들은 토지제도의 개혁,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쳤고
"지금 한 병이 침중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죽는 순간까지 순종의 가슴에 한 맺혔던 마 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없었지만 순종의 혼백은 6·10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다.
아직 순종의 염원이 이뤄지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 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고종의 홍릉과 같은 구조로 조성된 유릉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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