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名詩 감상

우표 한 장 붙여서/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 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어둠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名詩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무 많이 사랑해 버린 아픔/김동규  (0) 2009.11.25
오래된 가을/천양희  (0) 2009.11.14
모순/김남조   (0) 2009.09.07
이슬/황금찬  (0) 2009.08.07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이외수  (0) 2009.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