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하천 청계천을 조성한 태종 -1
도시구조에 눈뜬 태종의 선견지명
1410년 8월 8일, 큰비가 내려 청계천의 흙다리였던 광통교(廣通橋)가 무너졌다.
당시 왕이었던 태종은 신하들 건의를 받아들여 돌다리를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 사용한 돌이 참 이색적이다.
정릉에 있는 석물들을 모조리 파내 돌다리를 만들었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이자, 태종의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 덕수궁 근처에 위치했지만,
태종은 왕이 되면서 정릉을 현재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신덕왕후는 세자가 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태종의 거듭된 부탁에도 자신의 아들인 방석(태조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추대했다.
격분한 태종은 1, 2차 왕좌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다.
왕비 무덤을 장식한 돌을 파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증오가 컸다는 점을 암시한다.
태종은 백성들이 오가며 이 다리를 밟으면 신덕왕후의 기를 짓누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뿐인가. 태종은 다리를 건설하면서 의도적으로 정릉의 석물을 거꾸로 뒤집어놨다. 석물을 다 파내서인가.
정릉은 다른 왕릉보다 규모 등에서 작은 편이다.
이처럼 청계천 광통교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조선 초기 왕권 장악을 위한 권력 다툼이 얼마나 심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청계천. 청계천이 자연적으로 생긴 하천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꽤 있다.
하지만 청계천은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공하천이다.
1405년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후 도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종이 의욕적으로 지휘해 새롭게 만들었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몇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다.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됐을 때 수도는 개성이었지만,
태조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로 2년 뒤인 1394년 10월 28일 한양으로 천도(遷都)했다.
1394년 도읍으로 결정된 한양은 정종이 왕위에 오르고 1399년 3월 다시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잠시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400년 왕위에 오른 태종은 5년 뒤인 1405년 11월 한양으로 재천도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이 서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도로 적합했다.
여기에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구조는 도시 방어와 백성 관리에 매우 유리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한강이 남산 아래에 있다 보니 도심에 흘러드는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도심에 모인 물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비가 많이 오면 한양 도심은 홍수 피해로 큰 몸살을 앓았다.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도심의 홍수 피해를 미리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406년 1월 처음으로 개천(開川) 공사를 실시했다(청계천은 조선시대에 줄곧 '개천'으로 불렸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된 600명에게 개천을 파게 한 것이 청계천 공사의 역사적인 시작이었다.
손을 봤는데도 큰비가 내리면 한양이 물바다가 되었다.
1407년 5월 27일에는 큰비가 내려 천거(川渠·개천과 도랑)가 모두 넘쳤으며,
1409년 5월 8일에는 큰비가 내려 교량이 모두 파괴되고 두 명의 익사자도 발생했다.
1410년 7월 17일에는 도성에 물이 넘쳐서 종루(鍾樓) 동쪽에서부터 흥인문(興仁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통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홍수 피해가 심각해지자 태종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거듭 고민한 끝에 태종은 대대적인 공사를 감행키로 결심하고 자신의 의지를 신하들에게 공표했다.
1411년 윤 12월 1일 일이다.
"해마다 장맛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돼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다.
지금 개천을 파는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혹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개천 공사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이것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발언이었다.
태종의 대표적 참모인 하륜은 이렇게 답한다.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져 왔던 도(道)입니다. 창고를 열어 양식을 주고 밤에는 공사를 쉬게 해
백성들이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백성들에게 충분히 보상을 하면 공사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 하륜의 생각이었다.
성석린, 조영무 등의 신하들도 "운하를 파는 것을 멈출 수 없으며, 바야흐로 농한기여서 개천 조성 사업이 가능하다"면서
태종의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1412년(태종 12년) 1월 10일 태종은 마침내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삼남 지방 역군(役軍)을 동원해 준천 사업에 들어갔다.
태종은 개천 공사를 하면서,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침) 후에 공사를 시작하고,
인정(人定·통행금지, 밤 10시 종을 28번 침)이 되면 공사를 중지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어길 땐 감독관을 문책하겠다고 경고했다.
이 외에도 태종은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제생원(濟生院) 등의 관청으로 하여금 미리 약 만들 것을 지시했다.
또 천막을 치게 해 만약에 병이 난 자가 있으면, 치료를 아끼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개천 공사에 징발돼 온 지방 일꾼들에게 무리하게 작업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건강과 구호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청계천 공사의 핵심은 네 곳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담는 도랑을 준설해 이를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태종의 의지와 독려 때문인지 최초의 청계천 조성 사업은 비교적 빨리 완공됐다.
1412년 2월 15일 '태종실록'에는 1개월여 만에 공사가 끝난 상황이 기록돼 있다.
"하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다.
장의동(藏義洞) 입구로부터 종묘동(宗廟洞) 어구까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입구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공사에 동원돼 사망한 사람이 64명에 달했다.
태종은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집안의 부역을 면제하고 콩과 쌀을 줄 것을 명했다.
공사 완료 후 태종은 "하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세종 때 오늘날 서울시장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진(鄭津)은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하며 태종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신묘년(1411년)에 상왕 전하께서 천거를 뚫지 못하고,
도랑을 쳐내지 못한 것을 염려해 유사(有司)에게 명해 천로(川路)를 크게 개척하고 이를 파 터놓았습니다.
나라가 반석(盤石)같이 견고하게 되고, 백성이 편안히 잠잘 수 있는 즐거움을 얻었고,
만세에 이르기까지 후환을 대비하는 생각이 극진했습니다."
태종이 추진한 준천 사업의 성과는 세종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류의 작은 시내 중 다 파서 넓히지 못한 것을 보완하는 후속 조치가 이어졌다.
종로부터 하류의 개천을 넓혔으며 동대문 근처 수문을 증설하고 여러 다리를 석교로 개축했다.
1398년과 1400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주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무엇보다 새로운 수도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는 것을 국정의 주요 지표로 삼았다.
1405년에 단행된 한양 재천도도 이런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대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한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주민등록증 제도에 해당하는 호패법(號牌法)을 통해 백성을 관리한 것 역시 중앙집권 정책의 일환이었다.
백성들의 억울한 상황을 호소하게 한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게 한 것도 태종이었다.
청계천 공사 역시 국가의 행정력을 체계적으로 동원해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마련하려는 목적이 컸다.
청계천 조성 사업은 한양이라는 도시의 구조에 눈을 뜬 태종의 안목과 실천 의지에서 출발했다.
청계천 공사는 한양의 최대 약점인 홍수 피해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태종의 청계천 조성 사업은 350년 뒤인 1760년에 영조의 청계천 준천 사업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청계천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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