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순조의 즉위와 세도정치 -35

 

순조의 즉위와 세도정치 시작

농민 분노에 '홍경래의 난' 발발 정권 위기

 

 

1800년 6월 조선 후기 개혁정치를 이끌던 정조가 투병 끝에 승하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선 중흥을 이끌던 정조의 죽음은 조선 정국에 파란을 몰고 왔다.

정조 승하 후 왕위는 11세의 순조(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가 이어받았다. 순조의 즉위는 영·정조 시대의 강력한

 왕권이 사라지고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시작이 됐다.

 

순조는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1790년 6월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공(玜), 호는 순재(純齋)다.

정조는 왕비인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의빈 성씨에게 문효세자(1782~1786년)를 얻었으나,

문효세자는 5세 나이로 요절했다.

 

순조는 1800년 1월 효의왕후의 양자로 들어가 세자로 책봉됐다.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살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왕위에 올랐다.

조선 전기에 단종 12세, 성종 13세,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른 사례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엔 숙종이 14세에 즉위한 것을 제외하면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왕이 됐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시작된 원인을 어린 왕이 즉위한 것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19세기에만 유독 세도정치가 극성이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세력 있는 외척 가문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17·18세기에 행해졌던 붕당 간 견제와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과의 정략적인 혼인은 외척 세력에게 한층 더 큰 날개를 달아줬다.

성종이나 숙종은 신하의 보필을 잘 받고

왕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기에 왕권이 외척의 힘에 결코 휘둘리지 않았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관례대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1759년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던 정순왕후는 증손자인 순조가 즉위하면서 46세의 나이로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 큰 존재감이 없었던 정순왕후는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 등장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후 정조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혁파되고

개혁정치의 중심기관인 규장각이 축소된 것은 이런 정치적 변화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노론 벽파를 두둔했던 정순왕후는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다.

천주교가 당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 대부분이

남인인 것도 박해의 큰 원인이었다.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 신부가 처형됐다.

정약용은 겨우 처형을 면한 채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외가 근처인 강진에 귀양을 간 것은 정약용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실학자로 기억될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

 

순조 초반에 전개된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은 결과적으로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을 만들어준 셈이다.

 

순조 즉위 초반에는 정순왕후로 대표된 경주 김씨의 외척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1804년 순조가 15세가 되면서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뒀다.

이후 1805년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다. 안동 김씨는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를 배출한 집안으로

순조 초반 최대 실세가 됐다.

 

어리고 허약한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해준다는 명분으로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를 펼친 것.

순조는 정조를 도왔던 노론 시파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안동 김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안동 김씨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과 척화파의 대표자인 김상헌 이후

17~18세기 수많은 재상을 배출한 명문대가로 성장했는데, 순조 즉위는 안동 김씨의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세도정치는 원래 ‘도를 회복시킨다’는 의미의 ‘세도(世道)정치’로 쓰였다.

하지만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이 정조의 측근으로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면서, ‘세도(勢道)정치’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순조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는 19세기 외척과 소수 가문에 의해 독점되는 정치 형태를 뜻하는 용어가 됐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외에도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대구 서씨, 반남 박씨 등 명문 양반 가문이 혈연적으로 깊은 연결을 맺으면서 정권에 참여해

서울 양반의 연합정권과 같은 성격도 띠게 된다.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순조 이후에도 헌종(재위 1834~1849년)과 철종(재위 1849~1863년)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 외척 가문은 대왕대비나 왕대비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확고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왕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정치가 소수 외척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조선왕조는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가장 고통을 받게 된 계층은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세도정치는 권력의 독점을 가져왔고 수령직까지 매관매직 대상이 됐다.

수령과 아전들은 세금을 더욱 혹독하게 거뒀고

전정(田政·토지에 대한 세금), 군정(軍政·군역), 환곡(還穀·봄에 곡식을 빌리고 이자를 쳐서 추수에 갚음)의 폐단은 극에 달했다.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유민이 돼 떠돌아다니거나, 산속에 숨어 살며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농한기에는 광산에 모여 임노동에 종사했다.

국경 밖으로 넘어가 간도나 연해주에 이주한 농민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는 우군칙, 김사용, 이희저, 김창시 등과 함께 봉기의 횃불을 높이 올렸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들 삶이 곪을 대로 곪은 시절,

홍경래는 서북지방의 대상인과 향임층(지역 향반), 무사, 유랑 농민, 노비 등을 규합했다.

 

‘서북지방 지역 차별 타파’와 ‘어린 임금 아래에서 권세가 있는 간신배가 국권을 농단하니 백성의 삶이 거의 죽음에 임박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어린 왕 순조가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세도정치가 심화되는 상황이 반란의 동기임을 분명히 밝혔다.

 

1811년 12월 18일 저녁,

홍경래는 평서대원수의 직함으로 가산의 다복동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은 격문을 낭독하며 출정식을 올렸다.

 

“무릇 관서지방은

단군조선의 터전으로 예부터 문물이 빛나고 임진·병자의 전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난 자랑스러운 곳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이 땅을 천시하니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아니한가?

현재 왕의 나이가 어려

김조순, 박종경 등 권신의 무리가 국권을 농단해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헤어날 길을 모르고 있다.

(중략) 각 군현의 수령들은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라.”

 

10년간 준비 끝에 일으킨 거사인 만큼 초기 반란군 위세는 대단했다.

처음 다복동에서 1000여명의 병력으로 군사를 일으킨 홍경래는 평안도 백성의 호응을 얻어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9개 읍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반격에 가로막혔다.

홍경래 일당은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완강한 관군의 저항에 밀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정주성으로 퇴각했다. 전황은 반군에게 점차 불리해졌다.

반군 수뇌부들은 최후 거점인 정주성에 들어가 2000여명의 농민군과 함께 마지막 저항에 나섰다.

그럼에도 관군의 거센 공격에 1812년 4월 19일 정주성은 함락됐다. 거병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홍경래는 남문 부근에서 전사했다.

당시 관군에 체포된 자는 총 2893명으로 이 중 10세 이하 어린이를 뺀 1917명이 즉시 처형됐다.

장장 4개월간 평안도 일대를 휩쓸었던 농민 봉기의 열풍은

이날 정주성 위로 타오르는 시체의 검은 연기와 함께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 척결과 지역 차별 철폐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세도정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장기간 준비한 반란이었지만 충분한 물자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지방 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 못하면서 평안도 지역에 한정된 농민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으로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조선 사회를 저항의 시대로 열어나가는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홍경래의 난에 대한 후유증은 컸다.

 

순조는 세도정치에서 파생되는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보이지 못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왕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큰 원인이었다.

“경연을 여는 날이 적어 책 한 권도 끝을 맺을 기약이 없다”는 영의정 김재찬의 지적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왕은 정치 의욕을 잃고,

농민 부담은 더욱 가속화되면서 19세기 조선 사회는 점차 위기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