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실 사진전-서울 대학교 박물관
고종은, 재임기간이 43년 7개월이다.
12살에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 15살에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1874년 19살에 순종을 낳았다
1907년 56살에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한다
44살 때 명성황후를 잃고 45살 때 경복궁에서 러시아공관으로
46살 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 제국이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하여 개혁을 꿈 꿨지만 결국 59살 때 한일이 합방되어 권좌가 유명 무실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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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성왕후 민씨, 귀비 엄씨,귀인 이씨, 귀인 장씨, 귀인 정씨, 복녕당 양씨 이렇게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던 다음해에 귀비 엄씨에게서 영친왕이 태어났고
한일 합방 다 다음해에 덕혜옹주를 복녕당 양씨에게서 얻었다
민씨가 첫 아들을 낳았지만 의문의 죽음,둘째도,죽음
세째로 낳은 자식이 후에 순종(1874-1926)인데, 그는 불행히도 2명의 여자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와의 관계에서 후손이 없다
민씨는 네번째 자식도 죽고 다섯째도 죽었다
참 한 많은 여자다
9살에 고아가 되어 대원군 부인의 후원으로 왕비가 되어 대원군과 많은 대립각을 세웠고
그녀의 죽음도 비참했다.
누군가 씨를 말리려고 계략을 꾸미지 않고서야 4명의 자식을 어찌 다 잃을 수 있었을까?
아니 나머지 자식 순종도 제명에 죽지 못했다(52세) 귀비 엄씨, 장남 영친왕이
23살 위인 순종이 자식이 없자 주목을 받았다.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10살 때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이 보내진다 15살때 모친이 죽어 일시 귀국하고 육군 사관학교 졸업 후 22살 때
일시 귀국하고 24살때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 결혼을 하고,
그의 장남 이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하여튼 왕가의 후손들은 태어나면 죽었다
일본은 두려웠을지 모른다 왕가의 자식들이...영친왕은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평민 신분으로 생활하다가
1963년 박대통령의 주선으로 귀국하나 실어증으로 시달렸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그는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를 설립하고 명휘원을 설립 운영하다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로 죽었다
고종의 4번째 여인 귀인장씨는 의친왕을 낳았는데
의친왕은 덕인당 김씨와 무려 12남 9녀를 낳았다 장남이 이건이다.
5번째 여자 귀인정씨도 아들을 낳았으나 죽었다
6번째 여자 복녕당 양씨는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 고종에게 시집와 딸을 낳았는데 무척 고종이 귀여워해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을 덕수궁 안에 만들었을 정도다
그가 덕혜옹주다
첩에서 낳은 딸은 옹주로 불렸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였다 14살때 강제로 유학길에 오르고17살 때 생모 양귀인이 죽었다
19살 때부터 몽유병증세가 나타나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으며
20살 때 쓰시마섬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한다
22살 때 달 정혜가 태어났고 1953년 42살때 이혼 하였다 1962년 51살 때 귀국하여 낙선재에 머무르다 1989년 78세의 일기로 낙선재의 수강재에서 죽었다
이 모든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덕수궁이다
여긴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 집이었는데 임란 때 경복궁이 불타서 선조가 임시 거처로도 쓰였고
광해군도 여기서 취임식을 하였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폐위되고 인조가 여기서 즉위했다
고종도 여기서 즉위하고 여기서 죽었다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며
양위한 아버지 고종이 오래 살라며 덕수궁으로 고쳐 불렀다
이곳 덕수궁은 황실가족의 슬픈 사연과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경성역에서의 덕혜옹주-1925년 3월 28일 소학교 학우 100여명을 포함한 다수의 경성 주민들과 인사를 나눈 가운데 덕혜옹주는 한창수 이왕직장관(오른쪽)의 배웅을 받으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울음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에서 당시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잠시 귀국하여 종묘 참배의식을 거행하고 뒤이어 영녕전 참배를 행하는 모습-1918년 1월 16일
영친왕
함녕전에서 나오는 고종-1918.1.15
덕혜옹주의 마지막 소학교에서의 모습
석조전 오찬 기념 사진-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1918.1.23일 일본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찍은 사진
송별회장에 진열된 덕혜옹주의과제물-1925년 3월 23일-자수와 서예에 남다른 소질이 보였다 한다
덕혜옹주와 동급생
1925년 3월 덕혜옹주가 일본어로 쓰인 (국어독본)을 읽고 있다
봉고제의 참석 인사들-1919년 2월 9일 이토 히로쿠니제관장,조동윤제관부장,고쿠분산카이사법부장관,귀족대표 윤택영 후작,이해승 후작,이재각 후작,민영휘 자작과 야마가타 이사부로정무총감이 참석했다
황실 가족 사진-좌측 부터 영친왕(고종 둘째부인엄씨 장남 )순종(민씨아들) 고종, 순정효황후(순종 둘째부인)
덕혜옹주(고종6번째 부인 복녕당 양씨 장녀)-1918.1.21-덕수궁안 석조전(고종의 집무실)에서
동경을 떠나 부산항에 도착한 영친왕-1918년 1월 13일 오전-이 귀국은 지난 1911년 생모인 엄비의 사망에 따른 귀국 후 8년만의 일시 방문으로 뚜렷한 귀국 목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대외적으로 일본이 왕가들에게 잘 해주고 있다는 선전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때 민족 자결주의라 하여 미국은 자국의 일은 자기들이 해결하라는 분위기였고 아마 일본은 그것을 무마하려는 목적이...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 1962년 일 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형제, 민영환의 사위)선생의 유품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당시 조선 황실의 사정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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