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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국보 및 보물)

우리나라 중요민속문화재(제1~제10)




(중요민속문화재)

 

1.덕온공주 당의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 1964.12.07
소 재 지 :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조(재위 1800∼1834)의 셋째 공주인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이다.

이 옷은 그녀의 손녀인 윤백영이 저고리, 노리개, 원삼 등과 함께 아버지인 윤용구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7세 되던 해에 대궐에 입궐하면서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입으면서 개조하였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자주색 비단에 옷 전체에 수·복이라는 글자를 금실로 새겼다.

 

이 옷은 착용자 신분이 뚜렷하고 연대가 확실한 왕실의 유물로서

조선 후기 상류층의 복식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심동신 금관조복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 1964.12.07
소 재 지 :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으로,

조복이란 문신, 무신들이 동지와 설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때

입었던 옷으로,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적초의를 입었다.

심동신이 참판 당시에 입던 유품으로

금관, 적초의, 적상, 청초의(청초중단), 운학금환수, 패옥, 서대, 홀 등이 있다.

 

금관은 5개의 금색선이 붙여진 오량관으로 나무비녀로 고정시키게 되어있다.

조복인 적초의는 날씨가 더울 때 쓰는 항라로 만든 붉은색의 홑옷인데, 깃은 직선이고 넓은 동정이 달렸으며

소매가 넓고 양 옆이 트였다.

청초의는 조복인 적초의 바로 안에 입는 옷으로 중단이라고 하는데, 청색 명주로 된 홑옷이다.

직선으로 된 깃에 동정이 있고 소맷부리와 도련 등에 검은선이 둘러져 있다.

적상은 조복인 적초의와 같이 항라로 만들었으며,

전체를 잔주름으로 처리하였고 앞 3폭, 뒤 4폭의 양식으로 앞면이 뒷면보다 좁게 되어 있다.

 

운학금환수는 후수를 말하는데

큰대와 함께 달려 있으며 붉은색 바탕에 파란색, 노란색, 흰색의 세가지 색으로 구름과 학을 수놓았다.

윗부분 양쪽에는 금환 2개가 달려있다.

패옥은 조복을 입을 때 허리 양 옆에 하나씩 달아 늘어뜨리던 장신구로,

한쌍이 온전히 남아있으며 위에는 놋쇠로 된 고리가 달려있다.

서대는 조복에 쓰던 허리띠이며,

홀은 조복을 입을 때 갖추어 양손에 쥐어 예를 표시하던 물건인데, 상아로 만들었다.

 

이 금관조복은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되며, 부속품까지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복식사적 가치가 많다.


 



 

3.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 1965.10.12
소 재 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그의 비(妃) 유씨, 그리고 궁중의 정5품 상궁이 입었던 의복 4점이다.

1965년 해인사 장경판고를 수리할 때 남쪽 지붕 아래 구멍에서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이 의복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된 의류는 담청색 직령 1점, 백삼 1점, 홍삼 1점, 자주저고리 1점 등 4점이다.

 

이 의복들은 재봉질 못지 않은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세련되었던 바느질법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복 습관을 잘 나타내고 있어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외재 이단하 내외분 옷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 1965.10.12
소 재 지 : 강원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216 
시 대 :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 선생의 옷과 그의 부인이 입었던 옷, 그리고 그에 따른 머리 장식품들이다.

이단하(1625∼1689) 선생은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숙종 때에는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재직할 때에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고

죽은 뒤에는 그의 학문과 충성심을 높이 여겨 나라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유품은 좌의정 시절 그가 입었던 중치막 1점과 정경부인으로서

그의 부인이 입었던 대례복 1점, 누비저고리 1점, 그리고 머리 장식물인 봉대 1점, 다리 1점, 도투락댕기 1점,

용잠 1점 등 모두 7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치막은 사대부들이 관복 속에 입거나 겉옷으로 평소에 입는 옷인 창의의 일종으로,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동정이 없고 소매가 넓고 길며 옆이 터져있는

흰 모시로 만든 겉옷이다.

 

대례복은 녹색으로, 어깨와 밑부분에 금실로 수놓은 넓은 단이 있고 안쪽은 붉은색으로 선이 둘러져 있다.

뒤가 앞보다 길고 소매가 길고 넓으며, 소매 끝에는 홍·황색의 줄과 덧댄 소매인 흰색의 한삼이 붙어 있다.

이 대례복을 입을 때 큰 머리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103㎝나 되는 가발과

자주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도투락댕기, 동에 금을 입힌 용무늬가 있는 비녀,

그리고 붉은색 바탕에 봉황무늬를 금박한 봉대 등은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누비저고리는 방한용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에 따라 복식은 양식이 달라지는데 이것들은 시대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복식 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강릉 선교장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 1967.04.18
소 재 지 ;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6.사영 김병기 일가 옷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 1968.02.19
소 재 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1 고려대학교박물관 
시 대 :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병기(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이 입었던 옷이다.

김병기는 헌종 13년(1847)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까지 오른 인물로,

아들인 김용규는 참판을 지냈으며, 손자인 김승진은 정 9품의 벼슬을 지냈다.

 

유품에는 김병기 조복과 제복이 각각 1점씩, 구군복 2점, 쾌자 2점, 땀받이용 배자류 1점,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의 관복 각각 1점씩, 부인 송씨의 원삼 2점과 그 밖에

아들 김용규의 호패와 술이 남아있다.

 

조복은 신하가 왕에게 아침 문안을 드릴 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입던 옷이며,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이다.

구군복은 문관과 무관이 입던 군복이며,

쾌자는 전복이라고 부르는 옷으로 구군복을 차려 입을 때 협수 위에 입는 옷이다.

배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이며,

원삼은 궁중의 여인들과 사대부인들의 대례복일 뿐만 아니라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의

예복으로도 사용하였던 옷이다.

 

 

 



7.충무시 문화동 벅수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 1968.11.23
소 재 지 : 경남 통영시  문화동 95-123 
시 대 : 대한제국시대

 

세병관(국보 제305호)으로 오르는 길가 오른쪽에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어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장승은 하나만 있는 독장승이다.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장승이라는 명칭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있고 둥근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활짝 웃고있는 입에는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와 있는데 험상궂은 모습이기 보다는 익살스럽다.

앞면 몸체에는 ‘토지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광무 10년(1906)에 세워진 이 장승은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8.구례 운조루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 1968.11.25
소 재 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시 대 :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9.삼덕리마을제당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 1968.11.23
소 재 지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산128 
시 대 : 조선시대

 

제당은 마을의 신앙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인간의 일상생활과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성지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마을을 축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장군봉과 마을 입구에 넓게 분포하는 삼덕리부락 제당은 신을 모셔놓고

 위하는 집(당집)과 여러 개의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대상물(당산)로 구성된다. 장군당 안의

장군신도와 2개의 목마 중 큰 목마, 원항마을 입구의 돌장승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밖에도 천제당과 당산나무 10여 그루, 나머지 돌장승 2쌍이 이곳의 동제당이다.

 

장군봉 정상에 위치한 장군당과 천제당은 각각 장군신과 천신을 모신 곳으로서 규모가 작고 조촐한 건물이다.

장군신화는 장군당 내부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장군의 단호함이 잘 표현되었다.

이 앞에는 목마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큰 것은 원래의 철마를 도둑맞은 후 1940년경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작은 것은 근처에 살던 일본인이

기증한 것이다. 장승은 대청·관유·원항마을 입구에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다.

관유마을의 것만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고 나머지는 돌로 만든 석장승이다.

 

이 마을의 동제는 설날 첫새벽에 시작되어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데

마을 공동으로 제사비용을 추렴하고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한다. 마을에서 선출된 대표가 제관이 되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제사를 주관한다. 천제당에서 천제를 지내고 장군당에서 장군제와 용마제를 지낸 다음

산기슭 바위에서 잡신제를 지낸다. 이때 쯤 각 가정에서는 조상제를 지낸 후 장승 앞에서 벅수제를 지낸다.

그리고 원항마을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어로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별신제를 지낸 후

주민 모두가 어우러지는 풍물놀이를 끝으로 이 의례는 막을 내린다. 마을 전체를 위한 제사이고

마을의 구성원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능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동제가 잘 보존되어있고 다양한 신앙 대상물이 공존하고있어

주목되는 이곳은 민간신앙, 마을신앙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10.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

 

종 목 : 중요민속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 1968.11.25
소 재 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29 
시 대 : 조선시대

 

창녕 지방에 있는 옛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안채만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현소유자 하경목 씨의 18대 조상이 이 마을에 들어와 세종 7년(1425)에 지은 건물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때에 다시 지었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향한 안채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일반적인 앞면 4칸·옆면 1칸의 '一'자형 홑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대청·큰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처마는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기둥의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깊다.

이는 일조량과 강우량을 고려한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살림집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붕은 억새풀을 엮어서 얹은 초가로 수명이 길 뿐만 아니라 예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대청은 통나무를 윗부분만 편평히 깎아 깔았는데 매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목재는 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연결하였으며, 천장은 흙을 깔지 않은 상태로 구성하여 가볍게 한 점 등이

내부의 특징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고 부엌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 뒤로는 꽃계단을 꾸며 몇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울러 숲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일반가옥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술정리란 창녕현감 한강 정구가 지은 정자를 '술정'이라 한데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지정

당시에는 '창녕하병수씨가옥'이었으나, 마을이름(술정리), 거주한 내력(하씨), 가옥의 형태(초가) 등을 나타내는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