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세계유산 백제
언제 :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어디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백제 역사유적지구 세계 유산 등재 1주년 기념전을 2016년 11월 29일 ~2017년 1월 30일까지 전시하기에
다녀왔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릉이나 성 그리고 절 등은 제법 남아 있어 찾아 볼 수 있으나 정작 왕궁터도 추측이나 할 뿐이지
정확하게 확인되지 못하는 것이다.
무령왕릉 내부 견본
금제 관꾸미개 (왕)
국보 제154호
6세기 전반 - 공주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왕의 관꾸미개는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들었습니다. 중앙 위에는 활짝 핀 연꽃이 있고, 주변으로 뻗어있는 넝쿨 줄기가 마치 불꽃처럼
보입니다. 꽃과 줄기에는 127개의 원형 달개(步搖)가 달려 있습니다. 아래 줄기에 구멍이 있어 비단에 고정시켰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소매 넓은 자주색 도포와 푸른색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정 비단 모자를 착용했다."라고
전합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금꽃이 바로 이 관꾸미개 입니다.
묘지석 (왕)
국보 제163호
525년 - 공주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널길 입구에 놓여있던 2장의 장방형 석판은 왕의 묘지, 간지도, 매지권 그리고 왕비의 묘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죽은 이의 신분, 사망과 매장의 시점에 대한 기록은 동아시아 능묘 연구에 기준을 제시하였으며,
백제 왕족의 내세관, 장례 풍습 등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묘지석과 매지권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죽음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붕(崩)"이라 쓴 점은 백제 고유의 자존의식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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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작' 글자를 새긴 은제팔찌
국보 제160호
520년 - 공주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이 팔찌는 왕비의 왼쪽 손목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팔찌의 안쪽에는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지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팔찌는 왕비가 살아계실 때 착용했으며, 왕비를 당시에 대부인이라 불렀음을 알려줍니다.
바깥에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두 마리의 용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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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동자상
6세기 전반 - 공주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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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거울
국보 제161호
6세기 전반 - 공주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점의 청동거울 가운데 왕의 발치에 놓여 있던 것입니다. 꼭지를 중심으로 사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네 마리의 신수(神獸)와 이를 사냥하는 신선(神仙)이 있습니다. 신선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손에는 창을 들었습니다.
꼭지 주위에는 12간지, 바깥 테두리에는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이 담긴 문구가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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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 관꾸미개 (왕비)
국보 제155호
6세기 전반 - 공주 무령왕릉 - 국립공주박물관
왕비의 관꾸미개도 왕과 같이 금판을 오려 만들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문양을 만들고, 달개는 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래로 길게 뻗은 굵은 줄기는 청동으로 만들어 붙여 천이나 가죽으로 된 관모에 끼워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 가운데에는 꽃병에 연꽃을 꽂은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연꽃 주위로 넝쿨무늬가 화려하게 피어납니다.
이 연꽃무늬는 백제의 관뀜개가 불교적 세계관을 지녔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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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구
청동제 사리함 - 은제 사리 외병 - 금제 사리 내병
보물 제1767호
577년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목탑지 심초석의 사리공에 사리구를 넣고 주칠로 연꽃 넝쿨무늬를 그려 장식한 화강암제 뚜껑을 덮었습니다. 석제 장치 안에
청동합을 넣고 다시 그 안에 은제 병, 그 안에 사리를 넣은 금제 병을 두었습니다. 석제 장치는 외함으로, 청동함은
내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동합 몸체에 5자 6행 29자가 음각되었습니다.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가 두 매였는데 묻을 때에 신이하게 셋이 되었다."
로 해석됩니다.
금제 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
639년 - 익산미륵사지 -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사리봉영기는 금판의 앞뒷면에 도자(刀子)를 이용하여 음각하고, 각 획을 따라 주사(朱砂)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체 193자로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를 새겼습니다.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미륵사 서탑 창건의 주체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임이 밝혀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삼원식(三院式)인 미륵사의 창건에 선화공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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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판과 유리 구슬
639년 - 익산 미륵사지 -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사리공 바닥에 깔았던 유리판입니다. 사리공 바닥의 너비에 정확히 맞도록 처음부터 주문 제작된
특수 유리판으로 추정됩니다.
'상부달솔목근(上部達率目近)' 글자를 새긴 청동합
639년 - 익산 미륵사지 -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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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구
국보 제123호
7세기전반 - 익산 왕궁리 - 국립전주박물관
왕궁리 오층석탑의 1층 옥개석 동쪽 사리공예 금동 주칠 사리 외함(金銅朱漆舍利外函)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외함 안에는 금제 사리 내함(金製舍利內函)이 그 안에는 연화 대좌(蓮華臺座) 위에 놓인 유리 사리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함께 출토된 불상의 연대에 따라 9세기 말 ~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왕궁리 금제 사리 내함과 미륵사지 금동제 사리 외호의 세잎무늬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의장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짧은 선이 체워진 연꽃무늬는 사비도읍기 백제의 국왕과 귀족들이 애용한 문양입니다.
또한 모두 사리를 담은 용기는 유리병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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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원이 만든 일광삼존불('鄭智遠'銘金銅一光三尊佛)
보물 제196호
백제 혹은 중국 남조 6세기 - 부여 부소산성 - 국립부여박물관
불상과 좌우의 보살상이 하나의 광배와 함께 주조된 이른바 일광삼존 형식의 불상으로, 대좌까지 모두 함께 주조되었습니다.
뒷면에는 '정지원이 죽은 아내 조사를 위해 금상을 공경되게 조성하오니, 빨리 삼도를 떠나게 하옵소서
(鄭智遠爲亡妻 趙思敬造金像 早難三途)'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상의 조각 수볍이 매우 간략하고 광배의 불꽃무늬와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정교함이 떨어져 백제 불상 특유의 온화하고 세련된 조형감은 부족합니다.
사비기백제에서는 정씨나 조씨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아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었습니다.
금동광배(金銅光背)
7세기 전반 - 부여 부소산성 - 국립부여박물관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진리와 지혜의 빛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이 광배는 한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어서 불상의
머리 뒤에 있는 촉과 연결하는 두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얇은 투조판과 금동판을 결합하고, 매우 정교한 투각 기법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뒷면에는 '何多宜藏法師(하다의장이라는 승려)' 여섯 글자를 새겼습니다. 최근에는
'何多宜藏治佛(하다의장이 불상을 만들다)'로 읽어 하다의장을 장인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전하는 백제
불상의 광배 중에는 가장 온전하고 화려한 작품으로, 백제 불교공에의 수준을 잘 보여줍니다.
금동광배(金銅光背)
백제 혹은 북위 6세기 전반 - 부여 관북리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이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주변을 불꽃무늬로장식한 배 모양의 거신(擧身) 광배입니다.
두광의 중앙은 연꽃잎으로 장식되었으며, 광배 주위는 불곷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입체감을 더하였습니다.
광배 중앙에는 본존부과 결합시키기 위한 두 개의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 광배의 가장 큰 특징은 광배외연에
부착된 사각형 촉입니다. 삼국시대 금동광배 가운데 유일한 사례이며, 중국 북위의 영향 혹은 백제와 북위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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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은제 관꾸미개
보물 제325호
통일신라 - 칠곡 송림사 - 국립대구박물관
경북 칠곡의 송람사는 진흥왕 5년(544)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로 전합니다.
벽돌로 만든 5층전탑(보물 제189호)에서 확인된 사리구 중에는 백제의 은제 관꾸미개와 유사한 형태의 꾸미개가
출토되었습니다.
줄기와 가지가 대칭적으로 뻗은 줄기와 가지의 끝은 모두 보주형(寶珠形)이며, 2백여 개의 작은 원형 달개를 달았습니다.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호랑이모양 변기
짚신
7세기 - 부여 궁남지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단지와 숫돌
7세기 - 익산 왕궁리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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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전부천자차이(上部前部川自此以' 글자를 새긴 표석
6세기 - 부여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북서쪽 동남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파손되어 전체를 알 수 없지만, 대략 '상부와 전부가 이곳에서 나뉜다'는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5부5항으로 편제된 사비도성에서 현재의 '도로 표지석' 역할을 한 것으로 주정됩니다.
'대통사(大通寺)' 글씨를 새신 토제 벼루
6세기 전반 - 공주 공산성 - 공주대학교박물관
삼국유사에는 성왕(재위 523~554)이 웅진에 '대통사'를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공주지역에서 사찰 터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2012년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 건물지에서 출토된 '대통사'가 새겨진 벼루는 대통사가 실제 존해했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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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갑와(上部甲瓦)' 도장을 찍은 암키와
6세기 - 부여 부소산성 - 국립부여문화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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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자료가 있으나 다 올리지 못해 아쉽다.
나름
백제에 대한 호기심이 잃어 한강 몽천토성에서 공주 그리고 부여를 다니며 백제의 흔적을 찾아 보았는데,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폐망한 나라라 왕궁터나 중요한 흔적들은 거의 파괴되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땅 속에서 출토되는 것 외엔
별로 없다.
부여의 정림사지와 5층석탑은 부여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음을 알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흔적으로
5층석탑에 남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흔적은 볼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탁본으로나마 그의 흔적을 확인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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