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늦가을 창경궁 풍경-1

반백 중년 2012. 11. 17. 10:51

늦가을 창경궁 풍경-1 

 

 

언제: 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아직

내 안에는 가을이 머물고 있는데 서울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답니다. 

 

학창시절

봄이면 밤 벚꽃 놀이를 했던 추억

결혼 후

아내와 즐겨 찾았던 곳인데

30년이 지난 오늘

가을을 보내기 아쉬워 늦게나마 창경궁을 찾아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홍화문(弘化門)과 옥천교(玉川橋)

 

 

 

 

 명정문(明政門)과 옥천교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226호

 

  

 

명정전

 

 용상과 일월오봉도

 

 

 

명정전 문의 아름다운 문양 

 

 

  

 문정전(文政殿)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의견을 나누던 창경궁의 편전으로 명정전은 동향이나 문정전은 남향이다.

 

 

 

 

 

 숭문당(崇文堂)-영조의 친필

 

빈양문(賓陽門)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함인정(涵仁亭)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 

 

통명전 옆 우물과 연못  

 

 

 

 

 

위에서 내려다 본 통명전 옆의 연못 

 

 

 

 

 

 

 

 

 

 

성종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하다.

 

 

 

 

창경궁비화

 

조선시대 왕궁이었던 창경궁은 얼마 전까지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불렸다.

자그마치 74년간 동물원, 식물원, 놀이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봄이면 벚꽃놀이를 즐기던 시민공원이었다.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이 궁은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덕수궁과 함께 조선시대 5궁의 하나로 동궐(東闕)이라 칭하는 창덕궁 동쪽에 있다.

창경궁 터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 남경(南京) 천도를 위해 보우(普愚)스님의 진언에 따라 궁궐을 지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조선 초 세종이 즉위한 해에 상왕(上王)인 태종이 머물 궁궐을 이 곳에 짓고

궁궐 이름을 수강궁(壽康宮)이라 하였다. 이 당시 수강궁 공사는 수군(水軍)과 서울에 주둔한 군인들을 동원하였다.

수강궁이 완공되자 효성이 지극한 세종은 수시로 태종을 뵈러 이 궁궐에 자주 출입하였다.
그러나 수강궁이 지어진 해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세종의 장인이었던 영의정 심온(沈溫)은 그 해에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 사이에 심온 형제의 혁혁한 권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상왕 태종에게 고하기를
"심온 형제가 호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 것이 부당하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하니 이 말을 들은 태종은 크게 노하였다. 이는 태종이 세종에게 전위(傳位)하고 나서도 국정(國政)을 간섭한다는 의미였다.

태종은 즉시 이에 관련된 자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귀국 길에 있던 심온을 의주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에 심온은 자기가 명나라에 있을 동안에 발생하였던

즉 그 전말을 사뢸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이를 듣지 않고 수원으로 압송시켜 사약을 내렸다.
이때 세종비(世宗妃) 심씨는 머리 풀고 발을 벗은 뒤 수강궁의 태종 앞에 가서 자기가 대신 죽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태종은 심씨의 말을 듣지 않고 왕비의 생모 안씨까지 노비로 만들었다.

또 다른 불상사는

태종의 장남 양령대군을 서울에서 축출한 일이다. 세종의 형인 양령대군은 어느 날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아차산에 올라가 온종일 놀았다.

그러자 궁중은 양령대군의 행방이 묘연하자 발칵 뒤집혔다.

특히 상왕 태종은 너무 염려하여 식사도 거르고 사람을 놓아 양령대군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이윽고 밤이 깊어서야 양령대군이 돌아오자

측근은 이를 태종에게 알렸다. 이에 태종은 환관에게 명하여 의복과 술을 가지고 가서 데려 오도록 하였다.
양령대군은 이에 얼굴을 가리고 수강궁의 태종을 뵈었다. 태종은 양령대군을 보자 기쁘기도 하고 일변 노엽기도 하여
"네 행실이 나쁘지만 내가 부자(父子)의 정으로 용서하니 그리 알라."
고 타일렀다. 그러나 양령대군이 끝내 뉘우치는 빛이 없자, 태종은 양령대군의 일을 조정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한 결과

그의 거처를 서울에서 쫓아내 경기도 광주에 살게 했다가 후에 이천(利川)으로 이주시켰다.

수강궁에서 태종이 승하한 뒤에 이곳은 그의 후궁들이 거처하였다.

그 뒤 단종도 이 곳에서 즉위했으며 세조는 말년에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승하하였다.
수강궁이 창경궁으로 바뀌고 크게 지어진 것은 성종 14년(1483)의 일이다. 성종은 덕종의 차남으로 예종이 일찍 승하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가 7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수렴첨정을 끝낸 정희왕후는 성종 10년(1479)에 이르러 거처를 창덕궁에서 수강궁으로 옮기겠다는 하명(下命)이 있었다.

 세조비 정희 왕후, 예종비 안순 왕후, 성종의 생모 소혜 왕후의 세 대비들을 극진히 모시던 성종은 대비들을 낡고 좁은 수강궁보다

경복궁으로 일시 옮기게 하고, 창덕궁과 수강궁을 크게 수리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수강궁을 수리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새로 궁궐을 지은 것이다.

이때 성종의 신궁 건설에 대하여 많은 신하들이 반대가 있었지만 성종의 굳은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 14년(1483) 1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해 9월까지 궁궐이 지어졌다.

창경궁을 짓는 데에는 일반 백성은 물론 군인과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이 때 승려들을 동원한 것은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처음에 승려 증명서인 도첩(度牒)이 없는 2천명을 한정하여 이들에게 양곡을 지참시켜 30일간 노역하면 도첩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 달리 1년이 지난 성종 15년 2월에 이르러서는 4천명의 승려에게 도첩이 주어지자 유학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성종은 그의 소신대로 강행하였다.
그런데 공사가 진행된 지 2개월 후인 3월에 대왕대비 정희 왕후가 승하하자,

궁궐공사는 4개월간 중지되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궁이 완공되자 성종은 좌찬성 서거정에게 신궁의 이름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궁궐이름을 창경궁(昌慶宮)이라 하였다.



원래 창경궁은 대비의 거처로서 지었지만

궁내에는 승정원을 비롯하여 서연청(書筵廳), 빈청(賓廳) 등의 궐내 각사(各司)의 건축물이 구비되어 궁궐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다.

궁궐이 완성되면서 담 밖에서 백성들이 궁궐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빨리 자라는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성종은 창덕궁에 비록 거처했지만

정월, 동지 등 명절 때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청경궁에 가서 하례(賀禮)를 드리고 또 명정전에서 조회(朝會)를 받았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말년에 창경궁 후원에 서총대(瑞총臺)를 쌓게 하였다.

그 앞에는 큰 연못을 파서 큰배가 다닐 수 있게 했으나 연산군이 쫓겨난 후에 공사는 중지되었다.
이 서총대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모진 고생을 했으므로

백성들은 이 부역을 모면하기 위해 무명을 짜서 바쳤다. 이 때 사람들은 낡은 옷의 묵은 솜을 뽑아 질이 나쁜 무명을 짜서 바쳤으므로

이후부터 질이 나쁜 면포(綿布)를 '서총대 면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 서총대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의 풍경이 특히 뛰어났으므로 역대 왕들은 바람을 쐬거나 놀이 장소로서 이 곳을 찾았다.

그리고 서총대에서는 왕이 임석한 가운데 무신들의 활쏘기와 문신들의 과거를 보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서총대 과거(瑞총臺 科擧)」라는 말이 생겼으나 후에 「춘당대 과거(春塘臺 科擧)」라고 바뀌었다.

창경궁이 창건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패전 소식이 들리자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난민들이 각 궁궐과 관아에 들어가 약탈과 방화를 함으로써 창경궁도 이 때 소실되었다.
불타버린 창경궁을 중건하려는 계획은 광해군 때 거론되었으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광해군 7년(1615) 4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년 반만에 끝이 났다.

그 후 창경궁은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의 난 때 일부 전각이 불탔으나 인조 11년에 중건되었다.


그런데 숙종 때 이르러 창경궁은 장희빈(張禧嬪) 일파의 모략을 꾸미는 장소로 변모하였다.

본래 장희빈은 인조비(仁祖妃) 조씨의 시녀로서 숙종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으나

왕대비인 현종비(顯宗妃)가 그의 간사하고 악독한 성품을 간파하여 축출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 민씨가 숙종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자 대비의 경고(警告)를 듣지 않고 장희빈을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

 장희빈은 원자 경종(景宗)을 낳자 숙종의 총애를 더욱 받게 되면서 민비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장희빈의 모략으로 드디어 민비가 쫓겨나자 장희빈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숙종은 왕비 장씨의 지나친 투기(妬忌)에 실망하여 그를 멀리하다가 민비를 축출한 것을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숙종은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환원하고 5년만에 민씨를 왕비에 복귀시켰다.

그러자 장희빈의 원한은 하늘까지 사무쳐 창경궁에서 민비를 저주하는 갖은 짓을 자행한 결과,

민비는 시름시름 앓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숙종은 민비가 승하한 것에 의혹을 품었다.

결국 숙종은 그 동안 장희빈의 질투와 저주를 확인하고 그 일파를 처형한 뒤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으나

그는 사약그릇을 내던지고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옥교(玉轎)를 타고 친히 창경궁의 취선당에 와서 장희빈에게 사약을 먹도록 명하였다.

그래도 끝내 거부하자 숙종은 궁녀 수십 인으로 하여금 문판(門板)으로 장희빈을 덮어씌우고 그 위에 올라앉게 하여 압사(壓死)시켰다.

창경궁에서 태어난 세손(世孫)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창경궁 동쪽의 함춘원(含春苑) 자리에 사도세자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개축하여 경모궁(景募宮)이라고 높였다.
정조는 재위기간동안 비명에 간 부친 사도세자를 애도하고 추모한 왕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경모궁을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곳에다 할머니 영빈 이씨의 전각을 창경궁 안에 지어 드리고 자신도 이 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정조는 경모궁을 자주 왕래할 수 있도록 창경궁 홍화문 북쪽에 월근문(月勤門)을 새로 내었다.

조선말기인 순조 30년(1830) 8월에는 창경궁에 다시 큰불이 일어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4년 후에 중건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인접하여 사잇문을 통해 왕래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궁궐로 볼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대부분 창덕궁에서 왕이 거처했으므로 창경궁 역시 국왕 및 왕족의 출입이 잦아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日帝)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창경궁의 모습은 국가의 운명과 함께 변모해 갔다.

일제의 강요로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하자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접한 창경궁에도 국내외 인사들의 왕래가 잦았다.

당시 국가정치는 친일내각에 의해 좌우되었으므로 순종은 고종과 격리된 채 창덕궁에서 우울하고 쓸쓸하게 지냈다.

그러자 일제와 이완용 등 매국노는 순종의 위안을 겸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경궁 내에 동, 식물원을 꾸미기로 하였다.
또한 권농장 터에 연못을 파서 춘당지(春塘池)라 하고 연못가에는 일제식 수정(水亭)을 세웠다.

자경전 터에는 장서각을 지어 황실도서관을 만들고 박물관에는 옛 물건들을 수집, 소장함으로써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관)의 '3원'을 동원(東苑)이라 하다가 1911년에 창경원(昌慶苑)이라 고쳤다.
순종 3년(1909) 11월에 동·식물원이 개원되어 일반인에게도 관람을 허가했는데

 이와 같은 새로운 시설로 60여 채의 전각과 담장, 궁문이 파손되었다.
일제는 그밖에도 그들의 국화인 벚나무를 이곳에 많이 심어 벚꽃놀이를 즐겼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에 일제는 폭격 우려로 동물원의 맹수류와 큰 동물을 죽이고,

6·25전쟁 중의 1·4후퇴 시에는 모든 동물이 얼어죽거나 아사(餓死)한 일도 있다.
정부에서는 동물원의 동물을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기로 하여 1984년까지 모두 이전하였다.

또한 1983년 7월 1일부터 창경궁의 일반공개는 중지하고 그해 12월 30일에는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고침으로써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