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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벌교) 부용산과 꼬막의 고장 벌교(筏橋).

 

부용산과 꼬막의 고장 벌교(筏橋).

 

 

언제: 2011년 12월 17일

어디: 전라남도 벌교읍

 

 

정말

거의 한 달간을 꼼짝 않고 회사와 집만을 왔다갔다하는 일상이었다.

휴무일은 바람처럼 쏘다녔는데 왠일인지 밖에 나다니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그런데

얼마 전, 고향의 팔순 어머님께서 넘어지셔 뼈에 금이 가는 불상사가 생겨

지난 주 아내가 병문안을 다녀오고

이번 주는 내가 어머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에 정말 오랜만에 내 고향 벌교를 둘러보았다.

 

 

 

벌교(筏橋)

<태백산맥>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前

여.순 사건으로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을 겪으며 많은 양민들이 희생됐던 곳이다.

 

벌교는 지리적으로

동으로 순천 서으론 보성 남으로 고흥과 여자만(汝自灣) 북으론 낙안의 큰 들이 있어 교통의 요지이며 

5일의 큰 장이 열리기 때문에 

돈이 많이 있는 곳 그러기에 돈이 있는 곳에는 주먹이 있듯이......

예전에는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마라." 할 정도로 주먹으로 유명세를 탄 지역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래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이며 국내 문학기행의 1번지라 말 할 수 있으며,

또한 특산물 꼬막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남도의 조그만 읍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

 

소설 태백산맥의 흔적

 

현부자 집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 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과 제각은 본래 박씨문중의 소유이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며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다.

 

 

 

 

 

 

중도방죽

소설 태백산맥의 첫 장면인 정하섭이 새벽녘 중도방죽을 따라 소하의 방에 들게 되는 중도방죽과

여자만에서 벌교로 올라오는 갯물

 

 

 

철다리

소설 태백산맥에서 쌍칼 염상구와 땅벌의 결투가 벌어진 곳.

 

 

 

어렸을 적

벌교 장날이면 밀물 따라 여자만의 꼬막 배들이 통통거리며 혹은 노를 저어 철 다리 아래로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모른다.

비릿한 냄새와 주변은 술집이 많아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빈 바람만 왔다 간다.

  

 

부용산(芙蓉山)

 

부용산(192m)은 멀리 여자만을 바라보며 벌교읍내를 안고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국민학생 때

다른반과 축구시합을 하여 패하면 담임선생님께선 축구선수들을 에망고지(M-1고지)까지 달려 갔다 오라는 벌칙을 내려

많이도 올랐던 부용산이다. 

부용산 정상에는 돌담 같은 석성(石城)이 있었는데,

그땐 민족의 아픔도 모르고 올랐었다.

 

 

'부용산'이라는 시(詩)를 쓴 박기동은 그의 나이 10세 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이 곳 부용산에 그를 묻었다. 그날 부용산 오리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의 출발이다.

 

본디 1948년 목포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인 박기동(1917~2004)이 24살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은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였다. 여기에 같이 교편을 잡았던 월북 음악가 안성현이 다른 16살 애제자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와하며

선율을 붙였다. 그 뒤 남도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이 주로 불렀다는 이유로 묻혀졌다가,

1960~80년대 운동권, 진보 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알려지면서 애창곡으로 명맥을 이었고, 

가수 안치환 한영애등이 음반에 싣기도 했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벌교의 시인 박기동님의 부용산 시비(詩碑) 

1917년 11월 28일생인 박기동은 한의사였던 아버지 박준태의 덕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유학을 가게되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시로 낙인찍히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되었다.

80년대에까지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7평 남짓한 임대주택과 호주정부로부터 받는 월 연금40만원이 전부인 그의 가난한 삶에는 아직 희망찬 두 가지 미래가 남겨져 있다.

하나는 죽기 전에 개인 시집과 수필집을 발간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버린 조국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신념이다.

 

 

 

소화다리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던 곳.

 

 

 

 

 

소화다리에서 본 철다리 방향

철다리와 소화다리 사이에 예전엔 없었던 다리가 놓여있다.

국민학생 때는 소하다리까지 꼬막 실은 배들이 들어오곤 했었는데, 지금은 갈대밭 사이로 거품을 앞세운 밀물만이

홍교 다리 위에까지 치닫고 있다.

 

 

벌교의 랜드마크인 횡갯다리(홍교 : 보물 제304호)

  

홍교란

다리 밑이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를 말하며,

아치교·홍예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현재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현재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조선 영조 5년(1729)에 선암사의 한 스님이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놓여진 강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는데

나도 어렸을 적 구경을 한 적이 있다.

 

 

 

사진을 잘 찍을 것을 당시엔 이렇게 귀하게 쓰일 줄 몰랐다.

 

 

 

홍교 중수비

 

 

 

옛홍교다리에 없어진 부분에 새로 다리를 연결한 모습 

내가 국민학생 이전엔 없어진 다리는 나무다리였던 기억이 있는데, 5.16 정변 후 시멘트 다리를 세웠던 것 같다.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의 집

국민학교 다닐 때 이곳을 지나면 말(馬) 만큼 큰 개(새퍼드)가 있어 늘 무서워 했던 기억이 있다. 

 

 

 

채동선 음악당

“넓은 벌 동쪽 끝으로…”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 곡을 붙인 이가 채동선(1901~1953)이다.

벌교 출신의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고향>(정지용 시, 또는 박화목 시 <망향>, 또는 이은상 시 <그리워>) 등 우리 귀에 친숙한 곡들이 그의 작품이다

 

 

1901년 벌교에서 태어나 경기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재학중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이 때문에 4학년 때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일반 음악과정을 마친 후 1926년 귀국했다.
귀국 후

연희.이화여전 외국어 강의 외에는 창작과 바이올린에 열중하면서 국악 채보에 전념하는 등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쌓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채 은둔하다가

광복이 되자 고려음악회를 창설해 관현악, 합창, 독주회 등의 음악활동을 벌이다 6.25전쟁 와중에

부산에서 신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고향' '추억' '동백꽃' 등은 지금도 애창되고 있지만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였다는 이유로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으나 정부가 1995년 선생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면서

민족음악의 선구자로 재평가됐다

 

 

 

 

제석산(帝釋山)과 내 고향

해발 563m 산으로

기암괴석과 수석으로 유명하며 멀리 무등산 지리산 그리고 꼬막의 산지 여자만을 관망할 수 있으며 넓은 낙안 들과 벌교읍내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를 볼 수있다.  

산 아래 마을 연산리(蓮山里)가 내가 태어난 곳이며,

어렸을 적 제석산에 올라 꿈을 키우기도 했던 내 마음의 산이다.

 

 

제석은

불경에 의하면 하늘에 33천(天)이 있고, 그 가운데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는 높은 산으로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가운데의 희견성에 불법을 믿는 자를 보호하고 모든 악을 징벌하는 제왕인 제석천(帝釋天)이 기거한다.

도리천 사방에는 하늘 사람들이 거처하는 성이 8개씩 있다는 것이다.

 

 

'

 

제석산에서 바라본 여자만/순천만

사진 좌측 희미한 곳은 여수반도, 우측은 고흥반도이며, 

그 사이를 여자만 혹은 순천만이라고 하며,

사진 우측의 조그만 들판이 일제 때 간척을 하여 들이 된 소설 태백산맥에서 나오는 중도들이다.

 

 

 

 

제석산과 내 고향 전경 

 

 

 

내 고향 들에서 본 낙안 금전산과 낙안읍성 민속마을 

 좌측 멀리 높은 산 아래 유명한 선암사가 있다.

 

남도(南道) 벌교(筏橋) 

 

 

여자만(汝自灣) 아침 햇살

부용산 비춰오면 


밀물에 실려오는 한 서린 옛이야기
썰물에 실려가는 세상사 서른 이야기

님이여

기억하라

 

계절 바뀌어도 여자만은 출렁이고 
구름 가리워도

하늘 푸름을.

 


제석산 곧은 정기
벌교의 혼이어라

부용교 건너는 질곡의 신음소리

홍교다리 맴돈 바람 누굴 위한 노래인가


님이여

잊지마라

 

그 누가 뭐라해도 제석산은 변치않고
구름 가리워도

하늘 푸름을.

 

우촌(雨村) 씀

 

 

 

벌교 꼬막 시장 

 

 

 

키조개 

 

 

 

석화(굴)와 각종 해산물

 

 

 

 

 

 

꼬막정식을 먹으러 간 식당

 

벌교를 두루 둘러보고 남동생 둘과 함께 셋이서 점심을 하려 한 식당을 찾으니 손님들이 가득하다.겨우 한쪽 방에 자리를 잡아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자주 먹어본 음식이지만 잘 삶아진 꼬막을 까서 먹는 탱글탱글한 속살과 간잔즈럼한 꼬막속 물맛은 죽여준다.

 

 

 

 

 

 

 

벌교 참꼬막

 

 

10월부터 2월까지가 제철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그 맛은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작가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꼬막의 맛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주름이 많아 씻기 까다로운 조개라는 것부터 질겨지지 않도록 슬쩍 삶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양념 솜씨에 따라 집집마다

다른 꼬막무침 맛이 생겨난다는 설명까지 덧붙이면서 꼬막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름만큼 작고 앙증맞은 꼬막.

10월부터 2월까지가 딱 제철이니 지금은 뭘 해먹어도 맛있을 때.

 

 

 

 

 

삶은 꼬막

 

 

 

꼬막 전

 

 

꼬막 무침

 

양념 꼬막

 

 

여자만의 참꼬막이 맛있는 까닭

 

꼬막 열 중 아홉은 전남 벌교 출신. 

“청정해역 여자만의 찰진 개펄이 쫄깃하고 맛있는 벌교 꼬막 맛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여자만은 서남쪽으로 고흥, 서북쪽은 벌교, 북쪽은 순천, 동남쪽엔 여수로 둘러쌓인 곳입니다.!)

여자만은 청정해역으로

지난 1월 국내 해안습지로는 처음으로 국제습지보전 협약인 '람사르협약' 보전 습지로 등록된 벌교 갯벌은

모래나 황토가 섞인 여느 갯벌과 달리 유독 찰진 느낌이 화장품크림보다 더 고운 평가를 받고 있다,

여자만 갯벌 4000여㏊에서 꼬막 생산면적은 736㏊(39가구 어촌계)에 년간 생산량은 6500톤 200억원어치라고..

 

꼬막의 영양
고단백,저지방,저칼로리의 알칼리성 식품으로 소화도 잘되고 병후 회복식으로도 좋다.비타민 B12와  철분이 많아 빈혈예방에 좋고 어른에게는 조혈강장제로 저혈압에도 유익한 식품이다.또 칼슘이 풍부하여 뼈의 발육이 좋아지므로  아이들 성장발육에도 효과가 있다한다

 

'정약전의 자선어보'에도 기록된 꼬막은 옛부터 임금님 진상품으로 알려져 있고,

남해안의 청정해역에서만 서식하며, 헤모글로빈이 많이 함유돼 노약자나 산모등에게 특효약으로 알려진 꼬막은

 단백질, 무기질, 칼슘, 비타민 등이 다량 함유되어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참꼬막과 새꼬막과 피꼬막

 

꼬막은 새꼬막과 참꼬막 피꼬막 세가지. 

골이 거의 없어 매끈매끈하고 잔털이 송송 난 것은 구워 먹으면 좋은 새꼬막이다. 셋중에 더 맛있다는 참꼬막은

 털은 없고 골이 깊게 많이 파인 것이 특징이다. 즉, 매끈하고 잔털 난 새꼬막은 구워먹고, 털 없고 골이 파인 참꼬막은

 삶아 먹어야 제맛 또다른 구별법은 모양은 서로 비슷하지만 껍질에 패인 골의 수가

20개이면 참꼬막, 30개면 새꼬막, 40개면 피꼬막이라 불린다.

 

이중 가장 맛이 좋은 참꼬막은 다른 것과 달리 양식이 되지 않는 순수 자연산 어패류로

 가격도 새꼬막의 3배 정도 된다. 그만큼 육질이 탱탱하고 쫄깃하며 맛이 월등하다.

국내에서는 전남 벌교의 참꼬막을 상품으로 친다.

 

 

 

벌교에서 순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틋재 몰랑에 있는 화장실